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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08. 2024

장정일 《구월의 이틀》

작위적인 인물들이 뿜어내는 롤러코스터식의 무시무시한 속도감은 인정...

*2009년 11월 2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난 새벽, 손석희 교수가 진행하는 마지막 <100분 토론>을 모두 시청한 이후 읽으니 (물론 <100분 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는 100분 토론은 앙꼬가 없는 찐빵 같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100분 토론을 시청할 요량이고, 그래서 시사고발 혹은 시사토론 프로그램과 국민들을 유리시키려는 이 정부의 무지몽매한 우민화 정책으로부터 몇 개 남지 않은 프로그램들을 사수하고자 한다.) 장정일이 스스로 ‘우익청년 탄생기’라고 명명하는 이 소설이 더욱 잘 읽혔다.


  “우익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 다시 말해 은이 부산이라는 지역과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처럼 되지 않았을 공산도 크다... 우익청년의 탄생이 왜 이토록 간단하게 설명되고 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싶다. 첫째, 아무래도 물적 토대가 상부 구조(인식)를 결정한다는 맑시스트적인 공식을 벗어날 방도가 없기 때문. 둘째, 우리나라의 우익 인사들로부터는 우익 청년을 만들어낼 철학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 - 작가의 말 중에서...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별칭으로 달고 다녀야 하는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토론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연하는 여성 국회의원이 또 한 건 (그러니까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조차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 판결문에 대한 사실관계를 시민 패널로부터 지적받아야 하는, 게다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우기기까지...) 네티즌들에게 좋은 먹잇감을 제공하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무논리에 추상적이고 물타기와 끼워맞추기로 일관하는 이 땅의 보수 우익이라는 인사들의 수준을 다시 한 번 목도한 탓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소설 속 우익 청년의 한심함은 토론 프로그램 속 우익 인사들의 파렴치함에 비하면 애교 수준으로 읽어줄 수 있다.


  “... 말보다 더 강한 현실에 비해 한낱 꾸며낸 것에 불과한 소설 나부랭이는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금은 ‘거기 있는 그대로’, 그것을 목격한 사람에게서 즉각적인 육체적 반응 - 구토를 끄집어낸 사실의 힘에 눌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닫았다.”


 소설은 광주 출신의 ‘금’과 부산 출신의 ‘은’이 서울로 상경하면서 시작된다. 지역 운동을 하던 ‘금’의 아버지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청와대 참모로 참가하기 위하여, 그리고 ‘은’의 가족은 벌여놓은 사업의 부도로 도망치다시피 형님네 100억 재산의 일부를 돌봐주기 위하여, 라는 상이한 목적을 가지고 서울에 입성한다. 그리고 상경길에 우연히 마주쳤던 ‘금과 은’은 드디어 학교에서 서로의 존재를 진지하게 확인한다.


  “... 흔히 많은 어른들은 ‘내가 살았던 것을 그대로 적으면 소설 몇 권 분량이 된다’고 말하는데, 육십 평생의 행적이 몇 권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될 수 잇을지언정 그것이 ‘소설’로 화하지는 않습니다. 예술은 우리의 원체험, 각성의 순간 혹은 내면에 억압된 정신적 상처와 같은 숨어 있는 이틀을 끄집어내는 것이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나열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금과 은’ 두 사람은 대학에 입학하여 일 년여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내면에 억압된 정신적 상처와 같은 숨어 있는 이틀’을 확인한다. 한 청년은 성숙한 한 여인과의 사랑과 이별을 통하여 그리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한 동성 친구를 통하여 자신의 폭넓은 성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친구에게 성 정체성을 확인시켜준 한 청년은 자신의 나약함을 주저앉히면서 서서히 우익 청년으로의 길을 걷는다.


 “은의 생각으로는 ‘강한 것은 선하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명제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나라의 보수주의는 숫제 없었다. 보수주의자들이 왜 4 · 19 혁명보다 5 · 16 쿠데타를 찬양하는지, 왜 미국을 조국인 양 섬기는지, 왜 나라를 빼앗긴 조선보다 조선을 짓밟은 일본을 더 흠양하는지, 왜 크면 클수록 예수의 가르침이 분식(扮飾)되고 마는 대형 교회로 몰려가는지, 하다못해 퇴역 장교들로 운영되는 모모 연합회의 모모 회원이 왜 군복 차림에다 항상 가스총을 차고 다니는지! 이유는 하나다. 강한 것이 곧 선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꽤 재미있는 설정이고 장정일스럽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데 소설은 그리 미덥지 못하다. 스무살 연상의 여성과의 불꽃같은 사랑 이후 양성애자임을 확인하는 ‘금’ 그리고 젖가슴이 큰 여자 친구와의 섹스 실패 이후 자신의 동성애 경향을 자인하는 ‘은’, 여기에 노무현 정권의 핵심 참모이면서 급기야 자살을 결행하는 ‘금’의 아버지와 ‘금’의 아버지를 버리고 조선족 남자와의 결합을 꿈꾸던 ‘금’의 어머니, 아침부터 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다 술안주를 만들어주던 가정부와 눈이 맞는 ‘은’의 아버지, 그리고 그러한 ‘은’의 아버지의 불륜을 확인한 후 접신에 이르는 ‘은’의 어머니라는 롤러코스트의 배배 꼬인 철로와도 같은 인물들은, (그 엄청난 속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해서는 탈선하지 않도록 단단히 철로에 붙들린 열차처럼 작위적이다.


  우익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이들 우익을 때로는 희화화시키고 때로는 분석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러한 작가의 의중은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는 열차 위에서 터뜨리는 신음소리처럼 공허하게 흩어지고 만다. 긴 공백 끝에 도착한 작가의 소설은 고삐가 풀린 말처럼 그렇게 두서없이 내달린다. 그러고보니 소설은 몇 줄 이력으로 갈무리 되지 않는 작가의 이력을 닮아 있는 것도 같다. 산만하다... 

 

 

장정일 / 구월의 이틀 / 랜덤하우스코리아 / 338쪽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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