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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오이예미 《이카루스 소녀》

어리고 루즈한 테크닉으로 그려낸 어린 소녀의 칙칙한 성장기...

by 우주에부는바람

음... 내가 나이지리아 태생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던가. 그리고 열 여덟 살에 쓴 작품의 앞 부분을 출판사에 보내고, 곧바로 재능을 인정받아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작가의 글이라면 더더욱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음... 열 여덟 소녀가 쓴 작품이라기에 많이 성숙하다, 라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지만 기대치에 부응하지는 못하는 작품이다. 설익은 감을 억지로 먹기는 먹었는데 그 떫은 맛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나 할까...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절대로... ‘저들은 나를 내버려둬야 해. 혼자 책을 읽고 생각하게 내버려둬야 해.’ 만약 그들이 그녀에게 마음을 열라고, 다른 아이들과 더 많이 어울리고 친하게 지내라고 한다면 그녀는 비명을 지를 것이다...”


여덟 살의 소녀 제시는 나이지리아인인 엄마와 영국인인 아버지를 두고 있다. 학교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영리한 편이어서 한 학년을 건너 뛰어 월반을 한 상태이다. 조숙하기도 하여서 어른들의 생각쯤은 척척 넘겨짚고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대답을 할 줄도 안다. 하지만 그런 제시가 나이지리아를 다녀온 이후 숨기고 싶은 혹은 숨겨야만 하는 비밀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나이지리아의 할아버지댁을 방문했을 때 잠시 사귀었던 틸리틸리라는 소녀의 존재이다. 틸리틸리는 나이지리아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제시 앞에 나타나고, 친구가 없는 제시의 깜짝 놀랄만한 친구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시에게만 보일 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절대 띄지 않는 틸리틸리로 인하여 제시는 곤경에 처하고, 매켄지 박사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른다.


“엄마” “음, 크다. 아니……” “아빠.” “작다. 내 말은 좀더 작다는 뜻이에요……” “학교.” “아무도 없다.” “제스.” “사라진다?”


매켄지 박사가 던진 단어에 연상되는 단어를 빠르게 답하는 과정에서 제시는 자신의 속내의 일면을 드러낸다. 엄한 엄마와 다정하지만 조금 약해 보이는 듯한 아버지, 외톨이로 지내는 학교 생활과 자꾸 틸리틸리에게 끌려만 가며 자신을 상실해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말한다. 하지만 상담을 받는 와중에도 점차 제시를 장악하는 틸리틸리의 힘은 강해져만 간다.


결국 새롭게 사귄 매켄지 박사의 딸 시브스에게 상처를 입힌 제시는 틸리틸리에 대하여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좀더 강한 대응을 할 것을 주문한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틸리틸리를 만났던 나이지리아의 할아버지댁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할아버지에 의해 나이지리아식 주술사를 만나러 가다가 사고를 당하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틸리틸리를 통과하여 제시라는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녀를 부른 건 틸리틸리였다. 틸리는 제스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불렀지만, 제스가 너무 큰 동시에 너무 작고, 나무들을 가린 채 올이 굵고 검은 머리칼을 사방으로 흩날리며 굶주린 듯 기다란 팔을 앞으로 내뻗은 틸리를 마주했을 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제스가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틸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 안에 있는 또다른 자신,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자아를 끄집어낸 어린 소녀의 심리가 성기게 드러난 소설이긴 하다. 나이지리아와 영국이라는 두 가지의 원천을 가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제대로 흡수되지 못한 어린 소녀가 겪어야 하는 갈등도 없지 않다. 하지만 결국 나이지리아로도 영국으로도, 제시에게도 틸리틸리에게도 흡수되지 못하는 나란 독자가 가장 선명한 것을 어쩌랴...



헬렌 오이예미 / 박상은 역 / 이카루스 소녀 (The Icarus Girl) / 문학동네 / 423쪽 / 200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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