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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렌 하우스호퍼 《벽》

희망 없는 시간을 억누르는 벽의 안 쪽의 생명에 대한 기록...

by 우주에부는바람

어느 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나만이 남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2007년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나는 전설이다>가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윌 스미스가 세퍼드 한 마리와 함께 텅빈 도시의 낮을 배회하였다면, 소설 속에서 여자 주인공은 룩스라는 이름의 개를 동반자 삼아서 길고도 지루한 생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벽은 지루함을 몰아내는 데에는 단단히 한몫했다. 벽 너머의 들판과 나무와 강은 이제 지루함을 모를 것이다. 단 한 방에 들끓던 소란스러움이 멎었다. 저 너머에서는 비와 바람과, 그리고 텅 빈 집이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지긋지긋하던 시끄러운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 거대한 적막을 즐길 사람이 아무도 없다.”


물론 다른 구석이 더 많기는 하여서 영화는 변종 바이러스에 의해 텅 비어버린 도심 한 복판을 그리고 있고, 소설은 알 수 없는 벽에 의해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 채 텅 비어버린 숲을 그리고 있다. 사촌 언니의 시골집에 들렀다가 어느 순간 형체가 없는 거대한 벽의 이쪽에 갇힌 채, 살아있는 것들이 소멸되어 버린 벽의 저쪽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인 주인공은 하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장작을 패고, 감자를 수확하고, 밭을 갈아엎고, 건초를 날라 오고, 길을 고치고, 지붕을 수리해야 했다. 좀 쉬어도 되겠지 생각하면 금세 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멀리 벽의 저쪽으로는 멈춰버린 시간의 흔적들만이 보이고, 나는 벽의 이쪽에서 고군분투의 삶을 시작한다. 한시도 주인공의 곁을 떠나지 않는 룩스라는 이름의 개, 그리고 새끼를 배고 있으며 생명줄과도 같은 우유를 공급하는 암소 벨라, 저녁이면 숲으로 갔다가 새벽이면 주인공의 침대로 스며드는 어미 고양이, 그리고 그 고양이가 낳은 새끼 고양이 페를레와 티거, 그리고 암소 벨라가 결국 출산을 한 송아지가 바로 주인공의 새로운 식구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자 희망이다.


“... 나는 탁자 앞에 앉아 있다. 시간은 조용히 정지해 있다. 시간을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것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시간의 적막과 정지는 끔찍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집 밖으로 달려나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일에 열중한다. 그러면 잠시 시간을 잊는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시간은 다시 나를 에워싼다...”


중년에 접어든 여성, 그것도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시골 생활을 해보지 않은 여성이지만 그녀는 해보지 않은 일을 힘겹게 처리해간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그때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일을 해내고, 그렇게 수행한 경험을 밑바탕 삼아 또다른 일을 하고 있는 그녀이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역시 유일한 인간이라는 외로움, 바로 그 외로움을 사무치게 하는 시간들이다.


“... 이 글을 쓰는 데 거의 네 달이 걸렸다... 나는 지금 아주 편안하다. 이제는 종이도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이 계속된다. 오늘 아침부터 나는 벨라가 새끼를 낳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고양이도 또다시 새끼를 낳을지 모른다. 송아지, 페를레, 티커, 룩스는 다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새로운 것이 다가온다. 나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기록하고 정리한다. 암소 벨라를 위하여,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룩스와 송아지를 어떻게 잃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서술한다. 물리적인 원인은 전혀 거론되어 있지 않지만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거대한 어떤 날 이후 한 중년 여성이 잃은 것, 그리고 그로 인하여 오히려 얻은 것에 대해 진지하게 적고 있는 소설이다.



마를렌 하우스호퍼 / 박강자 역 / 벽 (Die Wand) / 문학동네 / 375쪽 / 200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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