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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르 아데롤드 《바보들은 다 죽어버려라》

'짜증나는 씹새'들을 죽여도 해결되지 않는 현대인의 짜증병이라고나...

by 우주에부는바람

제목만큼은 참 센세이션을 일으킬 법 하다. 바보들은 다 죽어버리라니... (물론 이것도 조금 약화시킨 것이다. 책을 읽고나면 원래 이 소설의 번역 제목은 <‘짜증나는 씹새’들은 다 죽어버려라>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잔뜩 폼을 잡는 대신 오히려 잡을 수 있는 폼은 되도록 생략하는 형식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자신의 막가파식 행태에 온갖 미사여구를 들이밀어 갖은 폼을 잡도록 만듦으로써 읽는 이를 참으로 헷갈리게 만든다.

“7층 양반의 연설은 나에게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고양이 한 마리의 죽음이 우리 건물 사람들의 우중충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던 삶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쳤다면? 자라의 죽음이 주민들의 협동과 연대성을 일깨우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면?...”

하지만 일단 동물애호가들은 절대 이 소설을 펼치지 않는 것이 좋다. 보통의 동물애호가들이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 덜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바보들은 다 죽으라는 제목에 혹할 수 있으나 이렇게 접근했다가는 크게 낭패를 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아파트에 사는 주인공은 오층 정도의 자기 집에 들어오는 옆집 고양이 자라를 망설임도 없이 발코니 바깥으로 집어 던진다. (끄악~ 실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나도 깜짝 놀라버렸다.)

짜증나는 인간에 대한 단죄를 원한 사람이라면 한참을 더 애완동물들의 죽음을 견뎌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러한 애완동물 살상의 묘사에 그다지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그저 담담하게 애완동물들을 죽이고 (라는 표현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애완동물들을 사라지게 한다, 고 표현한다) 이를 통해 인간 사회를 곤고하게 만들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헛된 바램이었음을 주인공은 곧 깨닫는다.

“... 새벽이 되자, 문제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평화롭고 화목한 동네 분위기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애완동물들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애완동물 주인들의 자세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주인공은 마치 쥐에서 영장류로 이어지는 신약 실험의 프로세스라도 따르는 것처럼 동물에서 사람으로 그 살해의 표적을 바꾼다. 동네 아파트 수위 아줌마 수잔을 죽이는 것에서 시작된 살인은 아내 친구의 남편, 버릇없는 운전사 등을 거치게 되고 나중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단체로 여행을 떠나는 노인들의 그룹으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나는 일정 나이가 되면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 18세가 되기 전에는 성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75세(그나마 잘 쳐준 것이다)가 넘으면 명민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와는 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이다. 선거만 있으면 투표소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들이다…….”

이렇게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은 살인이 거듭되면서 점차 자신의 살인의 의미부여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신과 상담의와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마리 반장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그렇게 그가 가진 ‘짜증나는 씹새’들에 대한 악의는 하나의 철학이 되고, 주인공은 그렇게 명분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살인 사건들에 곤고하고 합당한 이유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현대인이라면 (그 병증의 무겁고 가벼움을 떠나서) 누구나 앓고 있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살인이라는 극단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주인공의 행각이 끔찍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마음 속으로 주인공과 같은 살의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는가, 하는 물음이 던져진다면 그렇지 않다, 라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어느 순간 주인공의 끔찍한 행각은 고스란히, 실현되지 못했던 우리들 자신의 끔찍한 마음에 가서 닿는다. 그러니 이 소설의 계기에 대해 말하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시발점은 바로 텔레비전에서 어느 파리 시청 공무원을 본 날이었다.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아주 편리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혀 현실성 없는 그의 얘기가 나를 화나게 했다. 나는 텔레비전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텔레비전을 부술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그 공무원을 죽여버릴 것인가. 나는 글로 대신하여 그를 죽이기로 했다.”

카를르 아데롤드 / 강미란 역 / 바보들은 다 죽어버려라 (Mort Aux Cons) / 열림원 / 479쪽 / 200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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