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도, 너무 멀리 그리고 높이 날아가 버렸네...
중학생 때부터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들어간 경희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집이 있는 잠실에서 지하철 이호선을 타고 가다가 성수에서 갈아탄 후 신설동으로 가고(아, 헷갈린다...) 거기에서 또 어찌어찌 하여 일호선 휘경역까지 가야 했다. 그때는 지하철 역사에서 담배를 피는 것은 물론 지하철을 타고 난 이후에도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지하철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했는데 (마침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였다), 덕분에 지하철 역사에 가면 들어오는 지하철에 타느라 허겁지겁 끈 장초를 (그러니까 한 두 모금만 빨았을 뿐 새것이나 다름없는 담배 개피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지하철을 간간히 이용하고 있고, 생각해보면 그 안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여름 날 밀러 맥주에 빨대를 꽂아서 먹고 있는 여학생을 본 것도 지하철에서였고, 이호선에서는 꽤 유명했던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노숙자를 본 것도 지하철에서였으며, 술에 취하여 85학번 선배에게 홍대앞 꽤 높은 계단에서 뛰어내리도록 만든 적도 있고, 젊은 치기로 MT에서 돌아오는 일호선 안에서 신문지를 깔아 놓고 술잔을 돌린 적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도 만났고 코팅된 종이에 자신의 처지를 띄엄띄엄 적은 구걸 소년 소녀 장애우들도 만났다. 그러니까 사실 지하철은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은 그렇게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이면서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는 비일상이 공존하는 지하철, 그 중에서도 가이바이라고 불리우는 잡상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지하철 표류기라고 불리울 수 있겠다. 그곳에는 주인공 철이가 있고 그러한 철이를 가르치는 사부인 미스터 리가 있으며, 고린내로 쩔어 있는 노숙자 고려인이 있고 들을 수 없는 어린 임산부 수지가 있다.
소설은 할머니 조지아 여사의 악다구니에 밀려 미스터 리의 제자로 들어간 철이가 어떻게 지하철에서 살아남느냐 하는 일종의 로드 소설이면서 동시에 그곳에서도 사람이 있네 류의 인간 극장 소설이고 그곳에는 사람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으로도 충만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는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론 이 잡다한 캐릭터들이 아주 맛깔나게 뒤섞여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조금 어색하게 섞여 있다. 지하철에서 잡상인으로 살아남는 법 혹은 그 살아남는 법의 배후에 깔려 있는 음흉한 내막을 알려주나 싶던 소설은 느닷없는 농아 소녀의 등장과 함께 그 농아 소녀가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로 배경을 옮겨가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점프해버린다. 그런가 하면 등장인물이 하는 행동의 개연성이 철퍼덕 떨어지며 판이라도 튀듯 톡톡 튀는 부분도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개그맨 출신의 새로운 지하철 잡상인 철이와 농아이면서 임신한 아이를 위하여 지하철 구걸을 하는 수지가 드디어 쌍을 이뤄 장사를 한 첫 날, 수지는 느닷없이 뉴 트롤즈의 티켓을 구입하고 철이는 이 이탈리아 출신 아트락 그룹에 대해 실컷 아는 척을 해댄다. 혹시 작가가 몇 년 전 한국 공연을 한 적이 있는 이들의 콘서트 당시 관객석에 있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소설의 이 부분에서 뉴 트롤즈를 등장시킨 것은 좀 깬다.
지하철이라는 재미있는 공간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겉모습 그리고 좀더 나아가 그 이면의 모습까지 들여다 보겠다는 취지, 그리고 그러한 취지를 생뚱맞으면서도 발랄한 캐리커처 그리듯이 그려 보겠다는 의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현실과 이를 둘러싼 비현실들이 어정쩡하게 맞물려서, 그리고 과도하게 많은 등장인물들 각자의 히스토리를 역설하느라 너무 많은 지면이 소모되어서 아쉽다. 좀더 다듬어져야 했다.
우승미 / 날아라, 잡상인 / 민음사 / 261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