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치적 알레고리로 무장한 신개념 문제적, 사회 그리고 과학 소설의
역시 단정은 금물이다. 직전에 읽은 소설을 향하여 하지 않아도 될 한탄을 퍼부었는데, 그 다음에 집어든 소설이 그야말로 대박이다. 꽤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박민규의 ‘아마도 100년 후, 한국 문단은 작가 배명훈이 이 땅에 있었다는 사실에 뒤늦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 이라는 엄포성 카피를 읽으며 살짝 기대를 했는데, 그야말로 기대 이상의 작품이다.
소설은 674층에 2,408m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지상 최대의 마천루이면서, 인구는 50만에 아예 주권 국가 (그러니까 빌딩 국가라고 해야 할까) 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빈스토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연작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혹시 근미래 SF 소설이거나 경계 소설인가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범주로 규정하기에는 어렵다는 느낌이다. 근미래 SF 소설의 외양을 따왔지만, 미치도록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간파하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치밀하기 그지없는 내용의 소설로 가득한 탓이다.
「동원 박사 세 사람_개를 포함한 경우」.
빈스토크 미세권력연구소의 정교수는 어느 날 선물용으로 전달되는 술에 태그를 붙이고 그 태그의 위치를 따라 감으로써 빈스토크 내 권력의 실질적인 구조 그러니까 권력장에 대한 연구를 감행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세 명의 박사를 동원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연구는 난관에 봉착한다. 술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던 이들은 487층 A57 로 흘러간 술이 다시 다른 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곳에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배우 P라고 불리우는 ‘개’가 한 마리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 단순히 건물 내 권력자가 누구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일이었다면 개 한 마리쯤은 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권력장 權力場이 문제였다. 그것은 마치 우주 공간이 천체의 질량 때문에 중력장이라는 형태로 일그러지는 것과 같았다... 공간 자체가 권력장의 형태로 일그러진 경우에는 권력에 전혀 민감하지 않은 사람도 마치 본인 스스로가 권력의 눈치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발적으로 권력을 수용하는 행동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권력장 이론에 따르면 개도 충분히 권력 중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의 연구에 ‘개’를 포함시키자니 말이 안 되고, ‘개’를 빼자니 권력장의 논리적인 설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갈팡질팡하고 그 와중에 연구의 실질적인 리더인 정교수의 세컨드가 낳은 아이에게 선물을 하러 갔다가 이들은, 빈스토크 권력의 구린내 혹은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 어느 사회든 사람은 문명과 야만이 적당히 공존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문명 세계의 권력이 개인을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간다면 개인이 야만 세계의 폭력을 사용해서 거기에 저항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폭력 말고는 저항의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문명 세계의 권력은 일반인의 상식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폭력을 혐오한다...”
「자연예찬」.
작가 K는 우연찮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고 할 때의 바로 그러한 털면 먼지가 나는 사람이 되고 그 때문에 자연예찬에 몰두하는 그런 글들만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K의 변화와 그러한 K가 내놓는 자연예찬 가득한 소설에 대해 초보 편집자 D는 이해하지 못하며, 자꾸 예전 스타일의 글들을 보여달라는 채근을 한다. “시장과 엘리베이터! 심지어 제목까지 정해져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누군가를 비판할 때가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고 당사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때가 되면 회고하듯 담담한 어조로, 한 시대를 지배했던 사회 부조리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를 높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털어서 날 때의 ‘먼지’와 그 ‘먼지’로 인해 때묻을 각오를 하고 실세 권력에 저항했던 작가 K와 편집자 D, 그리고 저소공포증 (빌딩 국가인 빈스토크를 떠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러니까 지상으로 내려갈수록 공포를 느끼는) 때문에 빈스토크를 떠날 수 없는 작가 K의 눈을 대신하였던 로봇과 그 로봇의 관리인이었던 소녀 로사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시니컬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하아, 이렇게 로맨스를 쓸 수도 있구나, 하는 경외감이 드는 단편이라고나 할까. 빈스토크로 떠난 여자 친구를 위하여 빈스토크로 들어가기 위해 용병 노릇을 하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 구석에 떨어진 남자 민소... 자신이 전달하지 못한 무료 우편물 때문이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병수와 그런 병수의 방문에 사이트를 개설하여 민소 찾기에 팔을 걷고 나서는 은수... 위성으로부터 다운받은 사막 전체의 지도를 사이트에 올리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그 광대한 사막을 잘게 셀 단위로 자르고, 사이트에 접근한 네티즌들이 그 작은 셀들을 일일이 뒤져 결국엔 민소를 찾아내는 과정이 온라인의 순기능을 보란 듯이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엘리베이터 기동연습」.
수직운송조합과 수평운송노조로부터 비롯된 수직주의자와 수평주의자라는, 빈스토크에서만 그 개념이 통용될 수 있는 두 그룹 사이의 치열한 이념(?) 갈등을 꽤나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아래 위를 오가는 형태를 지향하는 수직주의자들과 이들에 맞서 층별로 가지는 나름의 문화들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조를 지닌 수평주의자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 대립을 해왔다. 그리고 나는 위급시에 경비대 혹은 군인들을 이동시키기 위한 엘리베이터의 징발과 조종의 계획을 짜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수평주의자인 한 여자와 잠시 인연을 맺게 된다.
「광장의 아미타불」.
빈스토크 바깥에 있는 아내에게 직접 전달하지 못하는 말을 처제와 형부가 편지의 형태로 주고 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권력자를 향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일단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해산시켜야 하는 임무를 지닌 외부 용역자의 역할을 하는 나, 그리고 나에게 부여된 해산 작전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아미타브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샤리아에 부합하는」.
빈스토크의 정보국 요원인 최신학과 코스모마피아의 스파이인 셰흐리반 사이의 대리전이 팽팽하기만 하다. 빈스토크를 어떻게든 무너뜨리려는 코스모마피아는 마치 외부에서 탄도미사일로 건물을 공격하는 것처럼 꾸미지만 실제로는 빈스토크 내부에서 거대한 물량의 폭탄을 폭발시킬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 코스모마피아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시청사의 이전, 그리고 이전을 틈탄 부동산 시세의 널뛰기 등이 이어지지만 결국 빈스토크는 심판의 날을 피하고 살아남게 된다.
여기에서 소설이 끝나고 나면 부록이라는 이름으로 <작가 K의 『곰신의 오후』 중에서>, <카페 빈스토킹 - 『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 <내면을 아는 배우 P와의 ‘미친 인터뷰’> 라는 세 개의 페이크 논문 (이라고 해야 하나) 이 실려 있다. 연작 소설 중에 언급이 되거나 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뒤에 부록으로 실어줌으로써 허구로 가득한 자신의 이야기를 보르헤스 식으로 지탱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와 함께 소설 전체의 이해를 돕는다는 설정 하에 「타워 개념어 사전」에 몇 개의 단어가 설명되어 있다.
가히 천재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작가는 우리 사회가 당면과제로 안고 있는 첨예한 문제들을 소설 가득 너스레를 품고서 잘도 이야기한다. 권력의 부패에 대한 문제, 사회 비판 기능이 거세되었던 작가의 문제, 네티즌의 (사회) 참여의 문제, 계층간 혹은 계급간 갈등의 문제, 용산 참사나 시청 봉쇄 등과 같은 디테일한 사회 문제, 국가간 전쟁의 문제와 국내 부동산 문제 등을 눈 하나 깜짝 안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소설에 녹여내고 있다.
이런 비범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주류 문학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심호흡을 하고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적인 발언의 포효를 하고 있지도 못한,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절절한 포장으로 대중들의 심중에 파도를 일으킬만한 미문이라도 토해내야 할테지만 그또한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문단의 중심에 큰 돌을 하나 던지고 있는 소설집이 아닌가 한다.
타워 / 배명훈 / 오멜라스 / 271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