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인종들의 빗나간 메시아 찾기 카니발에 뛰어든 열외인간들의 분투기...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찾기가 점점 힘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눈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사십년 된 입맛이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내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작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을 읽으며 얼핏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하향평준의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 같은데 이번에도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작가가 풍기는 한없는 여유로움은 좋지만, 그 여유로움이 지나쳐 촘촘하게 직조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기엔 어딘가 미흡하다.
“압구정역 4번 출구에서 한양아파트 쪽으로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5분 정도 이동한 거리에 위치한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
게다가 자질구레한 실수들이 눈에 거슬린다. 일부러 잘못된 길을 가르쳐주려고 작정을 한 것이 아니라면 (혹시 잘못된 길에 들어선 우리네 천민자본주의를 욕보이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다면) 왜 수많은 도심 속 장소들을 가리키면서 유독 이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으로 가는 길만 잘못 알려주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직접 거닐어 보지는 않았지만 압구정역에서 명품관으로 가는 출구는 4번도 아니거니와,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걷는다면 이십분은 훌쩍 넘을 걸...)
“참고로 녀석의 정체를 밝히면 다음과 같다. 녀석은 바로 기무다...”
그런가하면 불필요한 친절도 가득하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수구꼴통 퇴역군인 장영달 영감이 지하철에서 한 청년 때문에 불편해한다. 하지만 책을 바로 그 부분에서부터 읽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최소한 첫페이지부터 책을 읽은 이라면 누구나 그 청년이 주요 등장인물 네 명 중 하나인 기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인데, 이리도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덧붙이는 식이다.
뭐 이런 사소한 결격사유들을 들먹여가며 한겨레 문학상을 깎아내릴 의도는 아니다. 다만 도대체 우리나라 편집자들은 뭘 하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설마 오탈자를 골라내는 작업을 편집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으신지. 그게 아니라면 작가의 글에 적절히 개입하고, 게다가 그것이 신인작가라면 그들이 할법한 실수를 미연에 방지해주는 정도의 책임은 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이 정도에서 투정은 그만두고 (여하튼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책 읽는 맛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알아 달란 말이지, 끝까지 투정을 부리자면...) 이제 양대가리 가득한 소설은 수구꼴통 탑골공원 노친네인 퇴역군인 장영달, 88만원 세대의 아픔을 명품으로 삭이며 연봉 사천만원 정규직의 희망으로 들뜬 데이비디교도 윤마리아, 만사 귀찮은 노숙자의 전형이며 동시에 도심 속 생존법칙의 달인을 향해 달려가는 김중혁, 그리고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에 빈 집에서 섹스나 일삼고 PC 방에서 총탄이 난무하는 에프피에스 게임을 즐기다 돈 안내고 도망가느라 바쁜 기무라는 네 명의 열외인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살면서 일부는 닭대가리, 말대가리, 또 일부는 양대가리가 되어가고 있다. 닭대가리는 흡사 무뇌아와 같으며, 양대가리는 목자를 잃은 채로 어느 순간 도살당할 비루한 운명의 결말을 기다리는 무지의 포로와 같다.”
하지만 이 네 명의 열외인간은 소설의 중반 이후에 무리지어 등장하는 십헤드 카니발의 주역들인 열외인종들의 조금 디테일한 버전에 불과하다. 어느날 갑자기 ‘머리통과 얼굴이 양의 그것’으로 변하는 변태 체험을 한 양머리 인간들은 우리나라 소비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코엑스몰을 점령한 채 자신들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찾아 총을 난사하고, 이들에 맞서(?) 우리 네 명의 주인공들은 고군분투한다.
결국은 우리들 모두가 열외인종이고, 우리들 내부의 적군과 아군이라는 구분법 자체가 무의미한 작금의 한심한 사회 양상을, 온라인 게임이라는 번외의 형식을 끌어들이며 진행시키고 있는 소설은 그렇게 하룻밤의 꿈처럼 잔혹했던 코엑스몰에서의 카니발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한 불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이들이지만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케이블들은 왜 이렇게 헐겁기만 하단 말이냐...
주원규 / 열외인종 잔혹사 / 한겨레출판 / 317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