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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11. 2024

정한아 《나를 위해 웃다》

나는 언젠가 나의 진심을 이해하고 싶다, 그러고 싶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자신을 오해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오해했을 때 우리는 더욱 당황한다. 누군가를 오해했을 때 우리들이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상대방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듯, 나 또한 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나의 진의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 당황스러운 시절을 위태롭지만 버텨냈다, 라고는 아직 말할 수 없다. 아직 오해는 완전히 풀리지 않았고, 나는 위태로우나마 나의 진심을 이해하고 언젠가는 나를 위해 웃을 수 있기 위하여 애를 쓰는 중이다.


  그렇게 이 82년생 작가의 책을 읽은지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책을 읽을 당시 조금 서글퍼졌던 것 같다. 근래에 등장한 어린 작가들 중 가장 낫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도 같다. 흐릿하지만 강직하다고 해야 할까. 막연하지만 마냥 애매모호한 것은 아니다고 해야 할까. 강직하고 싶고 애매모호하고 싶지 않은 내가 아직 흐릿하고 막연하기 때문에 들었던 생각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 웃다」.

  곡절 없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여기 어떤 이는 느닷없이 잉태되어 너무 빨리 자라버리고, 또 느닷없이 버려지고 또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여지면서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게 될지도 모를 ‘나’를 잉태한다. “... 그때 나는 엄마의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엄마의 집은 아주 반갑게 나를 받아들였다. 그곳은 원래 나의 자리였던 것처럼 긴 여행에 지친 나를 품어주었다. 나는 조용히 엄마에게로 내려앉았다. 엄마를 사랑하기는 아주 쉬웠다. 이제 엄마도 혼자가 아니었다.”


  「아프리카」.

   2500만년전 갑작스러운 기온의 변화로 지금처럼 건조해져버렸다는 아프리카의 땅... 비가 멈추고 고온이 시작되면서 진화하거나 멸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아프리카의 생물들... 그리고 이제 철거되고 사라지게 되는 사창가, 그곳에서 운명을 다하고 있던 그녀들과 그들의 이야기... “겉모습이 변해버린 아프리카 동물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들이 과연 예전에 같은 종이었던 무리를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만약에 만난다면, 그들은 서로를 해치지 않을 수 있을까.”


  「첼로 농장」.

  키부츠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연들이 있다. “악기 하는 사람들,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아도 악기가 손에 붙어 있는 게 보이거든.”


  「마테의 맛」.

  “... 순간, 그 방의 주황빛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그 남자의 어떤 부분이 자기를 건드렸던 것인지 깨달았다. 가늘고 잘 엉키는 머리카락, 동그스름한 광대뼈, 속눈썹이 많은, 길고 작은 눈. 잠든 그는 예전에 그녀가 사랑했던 누군가와 닮아 보였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추억은 총성으로 갈기갈기 찢겨 있어, 이제 서울의 밤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끊임없이 서성일 수밖에 없다. 갑자기 생긴 성기기만한 공백은 그렇게 쉽사리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의자」.

  “... 큰 나무를 다루던 사람들은 작은 나무를 다루지 못해요. 그건 정신의 결을 반대방향으로 바꾸는 것과 같죠.” 할머니가 남긴 ‘눈에 띄지 않는 나무의자’ 하나가 간직하고 있는 길고도 긴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을 부여잡고 서서히 시작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천천히 그 끄트머리로 돌아오는 것만 같은...


  「댄스댄스」.

  “이 사람들한테 노래는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야. 사실 그건 음악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 이 사람들은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뿐이야. 아무런 목적이나 가치 없이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 그러니까 이런 아름다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느 호숫가의 고성, 뒷좌석에 여인을 태운 남자의 균형잡힌 자전거 타기... 형체가 없는 유산으로도 행복이 가능하고 품위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천막에서」.

  “... 그녀는 서울 변두리에 작은 작업실을 갖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작업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만날 때는 늘, 그녀가 내 방으로 왔다. 그녀는 흐르는 물처럼 머무르지 않고 돌아다녔다.” 스스로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휴머니즘과 로맨스는 나름대로 엉키고 설킨 채 비를 막아주는 천막 아래에서 사이좋게 누울 수 있을까.


  「휴일의 음악」.

  “최근에 윤과 나는 쉼없이 다투었다... 그가 완전히 질려버릴 때까지 나는 새파랗게 날이 선 말을 계속했다. 서로 논리를 따지다가 앞뒤가 뒤엉켜버리면 원래의 초점에서 완전히 벗어난 비난을 늘어놓았다... 불안 때문이었다... 그는 막을 통과하려는 사람처럼 내 몸을 밀어붙였다. 행위가 끝나고 나면 내 몸에 봉제선이 남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상처만 입힌 사람의 피붙이의 피붙이를 위하여 스스로를 소진시켰던 할머니... 정신을 놓았다 이상한 방향으로 수습한 뒤 허밍으로 무언가를 읊조리는 할머니... 그러한 할머니의 손녀인 내가 말하는 윤과의 다툼 또한 앙상한 할머니의 허밍을 닮아 있다.

 

 

정한아 / 나를 위해 웃다 / 문학동네 / 272쪽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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