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피크' 사라진 우리 시대 문학의 현주소
*2009년 7월 2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피크PEAK / 어떤 현상이나 사물, 사람의 기운이 가장 승한 상태, 성공적인 상태, 최선의 상태.
그러니까 이 소설집은 열 명의 젊은 작가를 모아서 바로 이 ‘피크’를 텍스트로 만들어 놓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소설은 ‘열 명의 젊은 작가와 떠나는 아슬아슬한 타이포그래피 롤러코스터!’라는 카피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 ‘피크’가 사라져버린 우리들의 젊은 작가들, 이라는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현장 중계하는 의미 있는 소설집일런지도 모르겠다.
태기수의 「파충류」.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 같았던 시대, 유신의 엄혹함이 절정을 달리고 있던 무렵인 1975년, 수류탄을 든 존재에 성폭력을 당한 후 미쳐버려 사육을 당해야 하는 어미 그리고 그 어미를 사육하는 듯한 시어미, 그런 할머니에게 휘둘려 어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나, 그리고 이젠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더듬어 일곱 살 시절의 나를 고해하는 지금의 나... “... 지금의 제겐 미워하고 증오할 만한 어떤 대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분노도 없고, 웬만해선 화도 잘 내지 않아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요. 감정이란 게 사라져버렸단 말입니다. 감정을 조율하는 뇌의 변연계가 파괴되었거나 아예 삭제되어버린 듯해요. 그렇습니다. 파충류처럼 말이죠. 이젠 꿈조차 꾸지 않습니다.”
양유정의 「유학산」.
과거와 현재... 그러니까 현재엔, 갑작스레 나타난 여자, 그리고 그 여자를 죽인 나, 그 여자의 사체를 묻기 위하여 찾은 유학산,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조국해방 13사단’이라는 한자가 적힌 비닐 표지... 그리고 과거엔, 낙동강 옆 유학산에서 마주치는 아군과 적군 그리고 아이를 잃은 여자와 그런 여자와 함께 하고 있는 시아비...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맞닥뜨려야 하는 이 낭패감이란...
이기호의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실려 있는 열 편의 작품 중 그나마 재미있는 축에 속한다. 공무원이 되어라, 라며 아버지가 건네는 문제집을 뚱하니 바라봐야 하는,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하고 소설 나부랭이를 쓰고 싶어하는 내가 서울의 형네 집으로 은둔을 하려다, 빤스인지 아닌지 애매한 옷을 입고 나갔다 불한당으로 몰려야 했던 나의 이야기... 더불어 김 주석의 사망으로 애매하기만 하던 사회 분위기가 BGM 처럼 깔린다.
해이수의 「絶頂」.
자신의 부하 장수 네 명이 잡혀 형장의 이슬이 될 위기에 처해 있는 그때, 이들의 상왕은 이렇게 말한다. “저 단두대에서 목이 베어진 뒤 나는 내 목을 들고 부하들 앞을 걸어갈 것이오. 부탁하건대, 그 앞을 지나쳐간 부하의 생명만은 살려주시오...” ‘1937년 독일 뮌헨에서 있었던 디츠 슈빙부르크 반란죄의 내용을 일부 모티프로 차용’ 하였다고 하는데 도통 우리무중이다.
김이은의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나는 이제 주인 없는 재킷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안전망의 홈을 붙들고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공중에서 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본다. 양손을 놓으면 나는 어디로 갈게 될까. 시퍼런 하늘과 아득한 저 아래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내 몸을 되찾을 방법을 생각한다. 너무 멀리 있지 않아야 할 일이다.” 서울의 미래를 보여준다는 J를 따라 갔던 거대한 건물, 그곳에서 작게 축소되어 주머니로 쏘옥 들어가버린 나...
김서령의 「이별의 과정」.
아버지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이자, 나의 ‘K’에 대한 이야기... “... 나는 언제인가부터 K와 헤어지고 싶어다. 다른 사람이 생긴 것도 아니었고 그가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한 번도 K가 없는 인생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 없이 살고 싶었다. 나는 싫어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오렌지주스와 사과, 그런 것들을 싹 치운 냉장고를 갖고 싶었다.”
김설아의 「청년 방호식의 기름진 반생」.
살짝 기름기 자르르 한 것처럼 보이는 방호식의 이야기...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듯 스물 여덟의 나이에 보다 진실한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방호식의 반생에 대하여... “... 올해로 28세인 그는 비로소 누군가를 이해타산을 떠나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갈 삶의 방향도 결정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저 순항을 하면 되는 선장처럼 여유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염승숙의 「적敵의 꽃잎」.
하나가 아닌 다섯 개의 그림자가 꽃잎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다. 오년 전 이혼과 함께 지각하였던 아이를 삼 개월만에 떼고, 그 후로 계속해서 젖이 흘러 나오고 있다. 엄마는 집안에 누워 있고 나를 둘러싼 그림자들은 내게 말한다. “... 너는 인간이고, 너이고, 혼자다. 그러나 너는 너로 살고 싶지 않은 너이고, 너로 사는 것에 회의하고 의문시하며 두려워하는 너이다.”
명지현의 「목표는 머리끄덩이」.
바람을 피운 남자 친구를 어떻게 해야 속이 풀릴 것인가. 함성 소리 가득한 데모대 사이로 도망치는 남자 친구를 쫓는 나의 이야기... “... 나를 함부로 대했던 수많은 인간들,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 외롭고 어두웠던 나날 모두를 이놈의 몸뚱이에 구겨넣고 힘껏 밟을 것이다. 비겁한 애인을 뒤쫓는 수천 명의 내가 있어 이 순간만은 외롭지 않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군중의 함성 속으로 곧장 들어간다...”
강진의 「너는, 나의 꽃」.
“... 남자는 주사기 피스톤을 밀어넣었다. 남아 있더 우윳빛 액체는 떠밀리듯 쇠락한 육체로 스며들었다. 주삿바늘에 찔린 혈관이 부어올랐다. 작별인사처럼 여자의 엄지발가락 끝이 움직였다. 여자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마지막 통증일 것이다...” 오래전 사랑이었던 여자를 다시금 만난 나... 하지만 그녀는 소생을 거부하고 있는 말기암 환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녀의 죽음을 돕는다.
태기수, 양유정, 이기호, 해이수, 김이은, 김서령, 김설아, 염승숙, 명지현, 강진 / 피크 : 젊은 작가 10인의 테마 소설집 / 현대문학 / 313쪽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