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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11. 2024

조너선 사프란 포어 《모든 것이 밝혀졌다》

뜩이는 창의성으로 무장한 세 가지 스타일, 한 가지 이야기...

*2009년 9월 19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한 달 가까이 같은 책을 읽었다. 사실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스텐드를 켜고, 자기 전에 몇 페이지라도 읽어볼까 책을 펴고는 했지만 번번히 실패한 탓이다. 대신 나는 책을 덮고, MBN이나 YTN의 뉴스를 보거나 지난 주의 패떳이나 무한도전 혹은 1박2일을 웃음기 없이 바라보거나, 때때로 크리미널 마인드나 CSI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 사건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는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어떤 부분만큼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야기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알렉스의 할아버지가 세계대전 당시에 겪었던 일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슈테틀 혹은 트라킴브로드라고 불리우는 마을에 살았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전쟁에 휘말리며 나치의 방문을 받게 된다. 마을에 들어선 그들은 유대인들의 회당 앞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유대인들을 지목하도록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 그리고 자신의 처자식들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지목하였다.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 한 명만이 남았다. 할아버지에 앞서 질문을 받았던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유대인은 없다고 말했고, 나치는 바로 권총으로 그 사람을 사살했다.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의 차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한 손은 자신의 자식의 손을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유대인 친구의 손은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유대인으로 지목했다. 할아버지는 살았고, 할아버지의 친구는 죽었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시대에 살았던 착한 사람이지... 내가 했던 모든 일은,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했다...”


  소설은 길고 지루하며 끔찍하다. 하지만 작가의 창의성만큼은 번뜩거린다. 소설에는 모두 세 개의 스타일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세 개의 스타일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재구성되고 반복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어느날 미국인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작가 본인의 이름이다) 자신의 할머니의 은인을 찾아 우크라이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통역 역할을 하는 것이 알렉스이고, 알렉스의 할아버지는 운전사 역할을 한다.


  소설은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쓰는 슈테틀과 관련한 소설, 그리고 알렉스가 미국에 있는 조너선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알렉스가 자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자신과 자신의 할아버지의 여행기라는 세 가지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슈테틀의 여자들이 내 7대조 할머니를 번갈아 가며 구경한 것도 이 구멍을 통해서였다. 많은 이들은, 아마도 그 신생아가 완벽하게 어른의 특징을 갖추었다는 점 때문에, 그녀가 악의 본성을 타고났으며, 악마 그 자체의 징조라고 확신했다...”


  어느날 갑자기 이 마을에 나타난 여자 아기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7대조 할머니가 되고,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사적인 역사는 이 할머니로부터 비롯된다. 환상적인 리얼리즘의 기법을 이용하고 있는 소설의 이 부분은 정신 없으면서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역사적 사실은 축약되거나 은유되고, 그 역사에 줄줄이 꿰어진채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변형되거나 짓궂게 묘사된다.


  “유대인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이 있다... 촉각, 미각, 시각, 후각, 청각……, 기억. 이방인들은 전통적인 감각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처리하며 기억은 사건을 해석하는 부차적인 수단 정도로 이용하는 반면, 유대인들에게 기억은 핀이 찌르는 통증, 핀의 은빛 반짝거림, 손가락에서 짜낸 피의 맛 못지 않게 일차적이다. 유대인은 핀에 찔리면 다른 핀들을 기억해 낸다...”


  작가 자신이 대학 시절 실제로 할아버지의 은인을 찾아 떠났던 우크라이나로의 여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소설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인류의 기억을, 우리들에게 교묘한 방식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작가는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한 마을의 기억을 퍼즐이라도 맞추듯이 끄집어냄으로써 현재의 우리들을 각성시키거나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 송은주 역 / 모든 것이 밝혀졌다 (Everything Is Illunminated) / 민음사 / 410쪽 / 200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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