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스토리로도 가려지지 않는 광폭했던 한 시절의 기억...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후에도 복잡한 심경은 영 개운해지지 않는다. 이 찜찜함의 제조년월은 이미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러니까 이 즈음에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었다), 아직까지도 개운치가 않으니 그 유통기한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러하니 이십여년이라는 나이차를 지닌 한 여인과 한 소년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러브스토리라는 달콤한 포장에도 불구하고, 뚜껑을 열고 나면 물씬 풍기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쓴내는 소설을 보는 동안에도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지금도 여전하다.
영화는 1958년, 전쟁이 끝나고 (아마도) 나치에 대한 암묵적인 동조자들이라는 굴레 혹은 세계대전의 책임자이며 패배자라는 낙인이 사회전반에 가득한 독일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전쟁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열다섯의 소년 마이클과 어딘지 알 수 없는 과거를 지니고 있는 듯한 서른여섯의 전차 승무원인 한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이 시작된다. 자신에게 찾아든 난처한 첫사랑 앞에서 (이제야 뛰쳐나갈 곳을 찾은 성적 욕망과는 무관하게) 쭈삣거리는 마이클과 성적으로 절정에 이른 나이라고 여겨지는 한나는 그렇게 나이차와는 무관하게 열정적으로 육체를 나눈다.
하지만 이러한 아슬아슬한 두 사람의 관계에는 또다른 비밀스러움이 파고드는데 그것은 바로 육체적 관계를 맺기 전에 한나가 요구하는 책 읽기가 그렇다. 성적 욕구로 가득한 소년을 제지하며 한나는 항상 육체적 관계를 맺기 전에 그에게 책을 읽어줄 것을 요구한다. 한나는 그렇게 그와 나누는 사랑에 앞서 그가 읽어주는 소설 속의 인물들과 동화되어 울고 웃고 달아오르과 난감해하는 전희(?)의 과정을 실제하는 섹스의 과정만큼이나 즐긴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익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 이것이 우리의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발췌)
이러한 만남은 어느 순간 마이클의 눈 앞에서 한나가 사라지며 그만 종말을 맞고 만다. 그리고 소설은 훌쩍 몇년을 뛰어 넘어 법대에 입학하여 전범 재판과 관련한 스터디 그룹에 들어간 청년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의 스터디 대상인 재판에서 나치 전범으로 피고인이 되어 있는 한나에게로 이어진다. (소설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년 시절 마이클과 한나의 사랑이 1부, 청년이 된 마이클과 재판정에서의 한나에 대한 이야기가 2부,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어 감옥의 한나에게 직접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전달하는 마이클의 이야기가 3부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그 재판의 과정을 통하여 한나가 자신을 떠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비밀의 실체를 알게 된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 그것은 바로 한나가 자신을 만나던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문맹인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나는 그러한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이 아닌 부분까지도 자신의 책임으로 가지며 결국 중형의 선고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재판정에 알릴 수 있었던 마이클 또한 이를 함구하고 만다.
그렇게 시간은 다시 흐르고, 이제 중년이 된 마이클은 교도소의 한나에게 자신이 직접 책을 읽고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고, 이를 계기로 한나는 교도소에서 글을 읽히고, 마이클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마이클은 테이프는 보낼지언정 한나에게 답장을 쓰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제 형기를 마치고 교도소를 나올 날이 얼마남지 않은 한나와 마이클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리는 면회를 통하여 수십년만에 서로를 대면하기에 이른다.
얼핏 보아 마이클과 한나의 수십년에 걸친 사랑의 연대기로 보이는 영화는 그러나 사실은 전쟁을 치러낸 세대와 바로 그 다음 세대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혹은 애초에 화해할 것이 없었던 관계의 은유로도 읽힌다. 그리고 그 관계의 보다 중요한 쪽에 아우슈비치의 유태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가지는 무게에 대하여 무지했던 대신, 문맹이라는 자신의 사적인 비밀이 가지는 무게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였던 한나가 존재한다. (더불어 한나를 연기했던 케이트 윈슬렛의 존재감도...)
비이성의 시대로 각인되어지는 그 시절을 문맹이라는 (그것이 이성과 비이성의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면) 형태로 대변하고 있는 한나는 그렇게 케이트 윈슬렛을 통해 소설의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살집 두툼한 알몸으로 도통 이해하기 힘든 섹스신을 선보이고, 가감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폄훼하는 재판장을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자신을 면회온 마이클을 바라보는 케이트 윈슬렛은 두말할 것 없이 소설 속의 한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두서없이 글을 써내려가는 중에도, 핍박하는 가해자의 편에 서있었으나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여인 한나를 통해 독일인인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비이성적인 역사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불행한 것은 아직도 이러한 비이성적인 역사가 완전히 중단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리더 (The Reader) - 책 읽어주는 남자 / 스티븐 달드리 감독 / 케이트 윈슬렛,데이빗 크로스, 랄프 파인즈 출연 / 123분 / 2009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