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애호 취향을 향한 익살스러운 도발...
음... 고양이를 키운 지 올해로 이십이 년이 되었다. 고양이를 키우게 되고 나서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는데, 내가 키우는 고양이와 너무 흡사하게 생긴 고양이를 길에서 발견했다. 나는 ‘용이’(내가 키웠던 고양이 이름이다)야, 크게 외쳤고 고양이는 내게 다가왔다. 난 긴 코트 안에 고양이를 품고 집에 돌아왔다. 세상에 이 추운 날 왜 집을 탈출한 거야, 어쩌고저쩌고 거의 울 것처럼 외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니 떡하니 고양이 용이가 거기에 있었다. 아내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들어온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 고양이가 용이인 줄로만 알았다고 말하였지만 밝은 곳에서 보니 용이와 그 길고양이는 여러모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이를 키우는 일로도 벅차하였던 나는 그 고양이를 다시 길에 내보내야 할지 그냥 거둬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날은 그 해 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다.
“... 저희 클럽은 버틀러, 즉 집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데 있어요. 우린 남들과 다르다. 너희는 우릴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이 고양이와 ‘소통’하는 것이 자신들의 교감 능력이 뛰어나서라고 얘기합니다... 고양이 비애호가들을 이해력과 교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본다는 얘기예요. 어딘가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한다는 얘기죠. 단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고양이 비애호가를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는 까닭은, 그게 그들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pp.83~85)
나는 아주 서서히 고양이라는 존재에 마음을 열었다. 고양이를 키우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고양이 관련 만화를 몇 권 읽었고, 고양이 카페에 가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버틀러에 (흔히 이야기하는 고양이 집사) 이르지는 못하였다. 우리집 고양이 용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다보니 길고양이를 보는 눈빛에도 애정이 묻어나게는 되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나마 이 정도의 수준에서 제어를 할 수 있었던 탓에, 고양이 애호가에게 반대하는 ‘안티 버틀러’ 모임을 주축으로 벌어지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저희는 ‘안티 버틀러’, 이 세상의 모든 버틀러에 반대합니다. 여기서 버틀러란, ‘집사’라는 의미로 일부 고양이 애호가를 지칭하는 데서 출발하였지만 그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취향에 근거해 타인을 차별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 자신의 취향을 숭배하기 때문에 타인의 취향을 낮잡아 보는 모든 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p.325)
소설은 고양이와 관련하여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의 고양이 애호(를 비롯한 모든 폐쇄적인 애호 경향)를 향한 테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자신들의 취향을 절대적인 것으로 밀어 붙인 사람들이 결국엔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재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들 안티 버틀러들의 생각이며, 이들은 바로 그러한 버틀러들의 세상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모든 취향은 취향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작가의 전제에는 크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취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해내는 버틀러들이나 버틀러들의 극대화된 애호 추구를 싫어하는 자신들의 경향성을 또 하나의 고착화된 취향으로 만드는 안티 버틀러들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버틀러들이 ‘취향’에 방점을 찍은 탓에 ‘존중’의 중요성을 잊었다면 안티 버틀러는 ‘존중’에 치중하다가 ‘취향’의 향기를 잃었다고나 할까.
이수진 /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 웅진지식하우스 / 363쪽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