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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12. 2024

《고양이를 버리다》무라카미 하루키

눈에 띄는 불화는 없었어도 평생에 걸쳐 쌓인 화해의 필요는...

*2020년 11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고양이를 버리다》에는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가 키우던 암코양이를 해변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자신들보다 먼저 암코양가 집에 와 있더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상적인데, 그래서 산문집의 제목이 ‘고양이를 버리다’가 된 것이리라. 그렇다고 고양이에 대한 산문집은 아니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가 희미한 자신의 기억 속의 아버지를 더듬더듬 하면서 쓴 산문집이다. 나도 아버지를 더듬더듬 해보기로 한다.




  “그때 아버지의 어리둥절해하던 얼굴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리둥절해하던 얼굴은 이내 감탄스럽다는 표정으로 변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소 안도한 듯한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결국 그 고양이를 계속 키우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집으로 돌아왔으니 키우지 않을 수 없겠지, 하는 체념의 심경으로.” (pp.15~16)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내 눈 아래로 정말 노랗고 하얀 꽃들이 경계석 안에 있고 눈 위로 햇살이 가득하고 아버지도 웃고 나도 웃는다, 라고 확언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것이 실재하는 장면인지 엄격한 아버지를 내내 무서워한 유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내가 만들어낸 장면인지 알 수 없다.


  “그는 교토의 산중에 있는 학교에서 승려가 되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마 착실하게 학업에 임했을 것이다. 그런데 절차상의 사소한 실수로 징병되어 혹독한 초년병 교육을 받고, 38식 보병총을 휴대하고 수송선에 올라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중국 전선에 보내졌다. 부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국 병사와 게릴라를 상대로 쉴 새 없이 전투를 펼쳤다. 평화로운 교토의 산속 절과는 하나에서 열까지 정반대의 세계다. 그곳에는 정신의 거대한 혼란과 동요, 그리고 혼의 치열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는 조용히 하이쿠를 읊는 것에서 위로를 찾은 듯하다. 그냥 글로 편지를 쓰면 검열에 걸릴 사연이나 심정도, 하이쿠라는 형식-상징적인 암호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에 싣는 것으로, 보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토로할 수 있다. 그것이 그에게는 유일하고 소중한 도피처였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그 후에도 오래도록 계속 하이쿠를 지었다.” (pp.47~48)


  아버지의 고향은, 그래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내 본적이 되는 곳은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이다. 아버지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돌아가신 두 번째 큰아버지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맏이인 큰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나이에 (두 누이는 있었지만) 맏이 노릇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마을의 이장을 하게 되었는데, 정부에서 나오는 쌀이라도 타 먹도록 마을의 어른들이 배려한 덕분이었다. 어느 방학 때 들른 아버지의 고향에서 동네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 내가 젊었을 때 결혼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완전히 소원해지고 말았다. 특히 내가 직업작가가 된 후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생겨 관계는 더욱 비틀렸고, 끝내는 절연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이십 년 이상 전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고,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대화도 연락도 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아버지와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눈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예순 가까운 나이였고, 아버지는 아흔 살을 맞았다. 그는 교토 니시진에 있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심한 당뇨를 앓고 있는 데다 몸의 도처에 암이 전이되어, 약간 살집이 있던 체구가 거의 흔적도 없이 깡말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아버지와 나는-그의 인생 마지막의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화해 비슷한 것을 했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코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pp.84~87)


  아버지는 병사로 군에 입대하였다가 어찌어찌 해서 장교가 되었다. 지금은 생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어찌어찌 가능한 케이스였나 보다. 육군3사관학교를 나와, 그냥 장교가 된 것도 아니고 보안사의 끗발 좋은 하급 장교가 되었다. 부안과 가까운 김제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보안사 장교라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아마도 기름으로 작동시키는 전기 장치를 활용하여) 상갓집에 전구를 밝힐 수 있었다. 그 동네에 처음 들어간 전깃불이었다고 어머니로부터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부하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보안사로부터는 곧 쫓겨났다. 내게는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p.93)


  책은 아주 얇다. 그 얇은 책 동안, 하루키와 하루키의 아버지가 화해 비슷한 것에 다다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 눈에 띄는 불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화해 비슷한 것이 필요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한다. 그 사이에 폰으로 승인과 취소가 반복되는 문자가 날아왔다. 셀프 주유소에 처음 들른 아버지가 헤맨 결과였다. 아버지는 지금 내가 결제를 확인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엄마와 함께 정선으로 2박 3일의 여행 중이시다.



무라카미 하루키 / 가오 옌 그림 / 김난주 역 /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猫を棄てる 父親について語るとき) / 비채 / 99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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