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안과 밖의 극심한 간섭과 혼란 속에서도 경이로운...
“장난삼아 시작한 일이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한 문장씩 기계적으로 옮기던 M은 무심코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주인공이 마시고 있는 커피를 밀크티로 바꿔서 번역한 것이다... M은 요술봉을 손에 넣은 신출내기 마법사처럼 변신술 놀이에 빠져들었다. 커튼 색깔을 자신이 좋아하는 자줏빛으로 바꾸고, 거실에 걸린 클림트 그림을 뭉크로, 좀더 과감하게 토이푸들을 벵갈고양이로 변신시키기도 했다...”
자신의 손아귀에 이야기를 올려 놓고 자유자재로 둥글릴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2007년에 등단하였으나 73년생이라는 적잖은 나이였던 작가가 첫 번째로 선보이는 장편소설인데, 일단 책을 읽고 나면 그가 보여주는 현란한 이야기의 테크닉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전혀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개의 이야기를 얼기설기 늘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아주 정교하게 이야기의 자발적인 확장성에 대한 은유로 작가가 아주 유효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아채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그 개별적인 이야기의 양태에 몰입되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의 보다 큰 본질, 하염없이 지속되는 무한한 이야기의 순환의 한 지점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근접해 가는 것이다. 이야기의 소비라는 독자로서의 역할 혹은 이야기의 창조라는 작가의 역할은 모두 유한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독자와 작가라는 양쪽 모두를 넘어서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무한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 작가의 솔직함과 영특함에는 정말이지...
소설은 모두 네 편으로 (라고 말을 하는 것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작가 자신은 각 챕터의 앞에 자신이 구상한 소설에 대해 사운드트랙이라며 각각의 타이틀을 붙여 놓았다) 구성되어 있고, 그 첫 번째 이야기인 여섯 번째 꿈이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는 인터넷 웹 사이트 실버 해머의 회원들은 악마라는 닉 네임을 쓰는 웹 사이트를 만든 이로부터 초대장을 받고 산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악마로부터 초대를 받은 여섯 명이 도착한 그날 밤이 되어도 악마는 나타나지 않고, 이들 여섯 명은 산장에 준비되어 있는 술을 마시고 산장에 준비되어 있는 여섯 개의 방에 각자 들어가 잔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 중 한 명이 죽은 채 발견되고 이제 이들 여섯 명은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차례대로 죽어간다. (아, 그나마 여기까지는 얼마나 전형적인 미스터리 소설 혹은 추리 소설의 규칙을 따르고 있었는지...)
“정말 악마가 우리의 꿈속을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르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악마의 꿈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나른한 오후의 낮잠을 즐기는 동안, 자신의 꿈속으로 우릴 초대한 거야...”
이어지는 두 번째 소설은 복수의 공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모두 여섯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모두가 운명처럼 얽혀 있는 억울함과 복수와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여섯 개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첫 번째 사운드트랙에 실려 있는 (작가의 의도가 그러하니 박자를 맞춰주도록 하자면) 글의 등장인물들과 묘하게 얽혀 있다.
동시에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 전체가 가지는 미스터리 이야기라는 설정을 통째로 가지고 들어와서 슬쩍 맥거핀처럼 (그러니까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삽입하는 일종의 미끼와도 같은) 삽입을 하여 놓기도 하고, 때로는 세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무심한 듯 집어 넣어 놓기도 한다. 물론 그것들이 워낙 자연스러우니 그저 무심코 넘어 갈 수 있음과 동시에 또한 자꾸만 두고두고 거슬릴 정도의 존재감 정도는 부여를 받는다.
“... 꽤 비중 있는 역을 따냈나 봐. 산장에 모인 사람들이 한 명씩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스토리인데, 거기서 두 번째로 죽는 여자를 맡았다나...”
세 번째 이야기는 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들이 이야기 바깥을 간섭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예를 들어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M은 자신이 번역을 하면서 임의로 살해를 한 고슴도치의 주인공인 하루로부터 전화를 받는가 하면,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여자는 M의 집에 들어와 M의 책을 읽고 M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세 번째 챕터는 작가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숙주 삼아 이야기가 번식하는 형국으로 치닫는다. M은 미스터리 클럽 Q라는 시리즈물의 번역을 의뢰받지만 실제로는 그 번역보다는 여자로부터 듣는 이야기에 몰두한다. 여자는 끊임없이 M의 글쓰기를 독려하였으나, M이 번역이라는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이야기로 M을 채워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장난삼아 시작한 일이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한 문장씩 기계적으로 옮기던 M은 무심코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주인공이 마시고 있는 커피를 밀크티로 바꿔서 번역한 것이다... M은 요술봉을 손에 넣은 신출내기 마법사처럼 변신술 놀이에 빠져들었다. 커튼 색깔을 자신이 좋아하는 자줏빛으로 바꾸고, 거실에 걸린 클림트 그림을 뭉크로, 좀더 과감하게 토이푸들을 벵갈고양이로 변신시키기도 했다...”
세 개의 챕터, 세 개의 이야기, 세 개의 음악을 지나면 드디어 장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라는 이야기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도서관에 들렀다가 송충이를 따라서 어느 한 권이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이 바로 <미스터리 클럽 Q - 제1권,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다.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소설 <폭우>를 읽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빌릴 수 없었던 그 소설의 후반부를 나는 결코 읽지 못한다. 서가의 한 귀퉁이에 숨겨 놓았던 소설이 사라진 것이다. 이십여일 동안 눈에 안대를 하고 있어야 했던 내가 도서관을 찾았을 때 그 소설은 사라진 뒤였다. 나는 결국 내가 읽지 못한 그 소설의 후반부를 스스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처음의 원텍스트와는 상관 없이 또 다른 이야기로 스스로 진화해가는 것이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말이죠. 내용이 끊임없이 변하는 책이에요. 누군가가 책 속에 자신을 유폐시켜놓고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는 거죠. 마치 유령이 연주하는 변주곡처럼. 백과사전에서 찾아본 원주율에 대한 설명이 이런 추론에 단서를 제공해주었죠. ‘초월수 π는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며 반복되지 않는다.’ 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이야기 사슬, 가장 단순한 폐곡선인 원을 규정하는…… ‘미스터리 클럽 Q’는 제1권이 바로 무한히 이어지는 전체 시리즈였던 셈이죠...”
책을 모두 읽고 나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얽혀 있는 이야기의 세계를 살펴 봤다는 느낌이 든다. 더불어 내가 이 소설을 혹은 이 소설에 실린 이야기들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자꾸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환상과 현실, 이야기의 안과 이야기의 바깥,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가 행하는 서로에 대한 극심한 간섭 탓이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다음 행보에 대한 기대감은 커질대로 커진 후이다.
최제훈 / 일곱 개의 고양이 눈 / 자음과 모음 / 379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