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내밀을 잃지 않으면서도 점차 확장되어가는 외연...
“고양이 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슬이다. 그 구슬을 따게 되면 나는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꺼내 들고 빛에 비추어 돌려 보며 점검한다. 고양이 눈은 진짜 눈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고양이 눈 같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존재의 눈처럼 생겼다...” (1권, p.105)
“... 나는 시간을 어떤 형태를 가진 것, 볼 수 있는 무엇, 켜켜이 쌓여 있는 일련의 액체 투광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간 선을 따라 회고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헤엄치듯 시간의 심연을 통과해 가며 회고한다. 때로는 이것이, 때로는 저것이 수면 위에 떠오르며 때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1권, pp.15~16)
소설의 첫 번째 문장은 시간이 공간과 같은 하나의 차원이라는 정의로 시작된다. 그것은 소설의 주인공인 일레인의 오빠 스티븐이 한 이야기였다. 일레인은 그 개념을 받아들여 시간을 선으로 연결된 흐름의 양태로 여기지 않는다. 소설 속의 일레인이 코딜리어를 만나던 아홉 살의 시절과 회고전을 앞두고 있는 중년의 화가가 된 현재를 거리낌 없이 오고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양이 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슬이다. 그 구슬을 따게 되면 나는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꺼내 들고 빛에 비추어 돌려 보며 점검한다. 고양이 눈은 진짜 눈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고양이 눈 같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존재의 눈처럼 생겼다...” (1권, p.105)
사십여 년이라는 시간의 갭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사십여 년 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역할을 해준 ‘고양이 눈’이라고 불린 ‘투명한 유리 안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꽃잎이 들어가 있는 구슬’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친구이면서 친구로서 억압을 행세함으로써 나를 곤경에 빠뜨렸던 코딜리어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내가 선택했던 ‘눈’이었다.
“나는 겨울 내내 책상 서랍 한구석에 들어 있던 내 푸른 고양이 눈을 끄집어낸다. 햇빛이 관통하여 빛나도록 구슬을 치켜들고 꼼꼼히 살펴본다. 그 크리스탈 원 속의 눈은 너무나 푸르고 너무나 깨끗하다. 그 크리스탈 원 속의 눈은 너무나 푸르고 너무나 깨끗하다. 얼음 속에 무엇이 얼어붙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어 학교로 가져간다... 이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때로는 나도 이 구슬이 보는 대로 볼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빛나는 자동 인형처럼 움직이는 것을, 그들이 아무 말도 발화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들의 형태와 크기를, 그들의 색깔을, 그들에 대한 아무런 느낌 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눈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1권, p.226)
소설은 나와 코딜리어가 맺었던, 내가 코딜리어로부터 맺음을 강요받았던 어떤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현재 밴쿠버에 살고 있고, 이제 회고전이 열리는 그 시절의 토론토에 와 있고, 토론토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보냈던 코딜리어와의 시기를 떠올리며, 토론토의 여기저기에서 코딜리어를 발견한다. 충분히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였지만 나는 이미 사십여 년 전에 그것을 극복하였다.
“... 나는 내게 일어났던 모든 나쁜 일을 잊어버렸다. 비록 코딜리어와 그레이스와 캐럴을 매일 만나지만 나는 이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다. 오직 내가 어렸을 때, 다른 친구를 사귀기 전에 그들이 나의 친구였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들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옛 전투의 날짜와 같이 매끈한 책장에 작고 건조한 글자로 새겨진 문장. 그들의 이름은 주석에 있는 이름들, 마구 번지는 잉크로 성경책 앞장에 써 놓은 이름들과 같다. 그런 이름에는 어떤 감정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먼 친척, 먼 곳에 사는 사람들,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 같은 것이다. 그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2권, pp.1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을 극복하였다고, ‘그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라고 선언하여도 나의 삶에 촘촘히 박혀 있는 그것들을 아예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그린 그림들에는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 바 있고, 나의 그림들이 회고전이라는 이름으로 한 장소에 모이게 되는 것처럼 그 순간 코딜리어와 그레이스와 캐럴과 그녀들의 엄마와 내가 함께 하였던 시간들이 모여든다.
“실제 삶에서 나날들은 일상적으로 흘러간다. 겨울을 향해 어두워져 가고, 말하지 못한 것들로 무거워지면서.” (2권, pp.269~270)
회고라는 시간의 역전은 작가의 시적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인 문장 안에서 경이롭다. 진득하고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묘사 안에서, 194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간의 전과정이 일레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의 곁에서 빛을 내고 또 빛을 잃어갔던 인물들을 투과하여 보여지고 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의, 고유한 내밀을 잃지 않으면서도 점차 확장되어가는 외연에 휩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이것이란다, 코딜리어.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앞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이제 완전한 밤이다. 맑고, 달이 없고, 별로 가득 찬 밤. 별들은 한때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영원하지 않고, 우리가 생각했던 곳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소리라면 수백만 년 전 일어난 것의 메아리일 것이다. 숫자로 만들어진 단어. 공허의 한가운데서 빛나는, 빛의 메이라.
그것은 오래된 빛이다.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선명하게 보기에는 충분하다.” (2권, p.347)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 차은정 역 / 고양이 눈 (Cat’s Eye) / 민음사 / 전2권 (1권 305쪽, 2권 353쪽) / 2007, 2010 (1988)
ps1. 『그 말에 안드리아는 놀란다. “그럼, 저어, 페미니즘은 어떻게 된 거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페미니스트 화가라고 부르는데.” 그녀는 말한다.
“그게 정말, 나는 정책이니 강령이니 하는 거, 고립된 집단 같은 건 싫어해요. 어쨌든 나는 페미니즘을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 늙었고, 당신은 그걸 이해하기에는 너무 젊지요. 그러니 그런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나는 말한다.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 것은 당신에게 의미가 없다는 건가요?“ 그녀는 묻는다.
”나는 여자들이 내 작품을 좋아한다는 게 좋아요. 왜 그러면 안 되죠?“
”남자들은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나요?“ 안드리아는 간교하게 묻는다. 그녀는 내 뒷조사를 했고, 마녀와 악령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보았던 것이다.
나는 반문한다. ”어떤 남자요? 모든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에요. 만일 사람들이 어떤 남자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남자이기 때문은 아니죠. 그냥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1권, p.146)
마거릿 애트우드와 그의 작품에 대한 페미니즘적 언급이 많은데, 위의 부분은 작가의 페미니즘에 대한 어른스러운 (혹은 늙은) 관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작가는 ”내가 페미니즘을 발명한 것도, 페미니즘이 나를 발명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페미니즘에 공감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페미니즘의 차원에서 글을 쓰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글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그것은 시대적 사명과 맞닿아 있었다. 결이 다를지 모르는데, 이 지점에서 발자크가 떠올랐다.
ps2. 작중 일레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품평을 읽을 때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소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