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되어 있는 스케일이 섬세한 고양이 월드에 폭탄을...
“우리 고양이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지만 인가들은 자유를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싫어서 신을 만든 것 같아.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한테 복종만 하면 되니까.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 되니까. 신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종교인들이 심약한 영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방식이기도 하지. 인간과 달리 고양이는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질 줄 알고 자유를 두려워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거대한 고양이가 하늘에서 지켜본다는 상상을 할 필요가 없는 거지.” (pp.101~102, 1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타나토노트》, 《아버지들의 아버지》, 《기계》, 《뇌》《천사들의 제국》, 《나무》, 《파피용》과 같은 책들을 읽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제목이 고양이, 라는 것을 발견하자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소설을 읽은 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십 년 쯤 전에 《파피용》을 읽은 것이 마지막이다) 문득 깨달았다.
“우리 고양이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지만 인가들은 자유를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싫어서 신을 만든 것 같아.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한테 복종만 하면 되니까.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 되니까. 신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종교인들이 심약한 영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방식이기도 하지. 인간과 달리 고양이는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질 줄 알고 자유를 두려워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거대한 고양이가 하늘에서 지켜본다는 상상을 할 필요가 없는 거지.” (pp.101~102, 1권)
내가 키우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가 내게는 세상의 고양이들의 전부이다. 물론 후배의 고양이 소피, 하루, 하울이가 있기는 하다. 나는 후배가 고향을 방문하며 장시간 집을 비울 때면 세 마리의 배설물을 치우고, 사료통을 확인한다. 선배의 고양이 돌돌이와 꽃분이도 있다. 돌돌이는 일년 전 쯤 무지개 다리를 건넜고, 꽃분이는 이름과 상관없이 수놈이다. 그러고보니 친구의 고양이 친친도 있다. 친친이가 남긴 상처가 아직 오른 손 손등에 남아 있다.
“...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2천5백 년 전에 이집트 문명은 사자 머리가 달린 세크메트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었어. 그런데 사자들이 그들을 키우던 사제들을 자꾸...... 잡아먹었어. 너무 많은 사제가 죽자 이집트인들은 세크메트의 여동생 격인 여신을 만들었어. 머리가 고양이처럼 생긴 이 여신의 이름은 바로...... 바스테트야.” (p.103, 1권)
내가 키우고 있고 후배가 키우고 있고 친구들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들은 모두 거리의 고양이들이었거나 거리의 고양이들의 후예이다. 모두 집의 바깥에서 태어난 다음 우여곡절을 거치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친친을 제외하고는 (친친은 집과 밖을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그래서인지 무척 야성적이다) 주로 집 안에 머물며 살고 있다. 후배의 고양이 중 소피는 바깥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후배의 말대로라면 절대 집을 잃어버리는 법이 없단다.
“우리는 공(空)이며,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생각이 그것을 구성한다는 사실이야... 이 무(無)에 육체의 형태를 부여하고 개체로서의 지각을 갖게 하는 건 바로 생각이야.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이 개체에 어떤 것이 <생긴다>고 우리는 믿지. 하지만 우리가 육신의 껍데기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지각만 해도 우리는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생각이 곧 우리라는 거야.” (pp.107~108, 2권)
내가 원한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키우는 고양이 그리고 나의 지인들이 키우는 고양이들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덧붙인 어떤 상상력을 들여다보기를 원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소설 속 고양이들은 나의 바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고양이 바스테트와 고양이 피타고라스는 내가 원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작정하였다.
“우리는 정신의 도구만 발전시켰지 기억의 도구는 발전시키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고양이들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지. 정보를 남길 확실한 수단이 없는 거야. 우리는 장기 기억이 없어. 최초의 개척자들은 아마 우리 역사를 자식들에게 들려줬을 거야. 그 자식들은 또 부모의 얘기를 자기 자식들에게 들려줬겠지. 하지만 전해져 내려오면서 얘기가 조금씩 변형되고 사실성마저 의심받다가 결국 하나의 흔한 이야기로, 전설로 남게 됐을 거야. 그러다 나중에는 모두에게 잊혀졌겠지. 불변하는 매개체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의 운명이 그렇듯 말이야.” (p.186, 2권)
코드가 맞지 않았던 셈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가리키고자 하는 것과 내가 바라보고자 한 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너무 확대되어 있는 스케일의 이야기 안에서 고양이는 고양이로 온전히 존재하기 힘들어 보인다.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가 직접 고양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다면 이보다는 훨씬 작고 섬세한 이야기를 펼쳐 보였을 것이다. 물론 그건 베르나르 베르베르 답지는 않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을 것이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 Bernard Werber / 전미연 역 / 고양이 (Demain Les Chats) / 열린책들 / 전2권 1권 238쪽, 2권 244쪽 / 2018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