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표 소설의 탄생에는 없을 법한 비하인드 스토리...
좀처럼 태작을 발표하지 않는 (그렇다고 이 작가의 모든 작품이 걸작은 아니다.) 이 일본 출생 벨기에 국적 프랑스 문단 소속(?)의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는 아니고 페이크(?) 자서전과 이를 통한 자기 패러디가 화려하게 수놓인 작품이다. 최근들어 조금은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와 미스터리와 추리 내지는 형식 파괴를 넘나들며 다소 주춤했던 작가가 이번에는 <두려움과 떨림> 혹은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시절로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게 돌아간 듯한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은 다섯 살까지 살았던 일본에 다시 돌아온 스물한 살의 나 아멜리가 프랑스어로를 공부하는 스무살의 일본인 대학생 린리(Rinri)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프랑스어 과외, 흥미로운 가격’이라는 전단의 문구를 보고 전화를 걸어온 린리와 나 아멜리의 수업은 카페에서 시작되고, 곧 서로에게 프랑스어와 일본어 선생이 된 두 사람의 수업은 이제 린리의 가정 방문으로 이어진다.
『“아주…… 독특하신 분들이네요.” 내가 지적했다.
“늙어서 그래요.”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가 캐물었다.
“나이가 드셨죠.”』
보기와는 달리 고급차를 몰고 다니며 어마어마한 집에서 살고 있는 린리의 집에서 나는 치매에 걸린 듯한 그의 조부모를 만나기도 하고, 그의 부모에게서 선물을 받으며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급기야 린리와 딱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한 관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사랑이 아닌 연민의 이야기, 아이(愛)가 아닌 코이(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이가 없는 이야기를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경우가 그렇다. ‘코이’ 이야기니까.”
하지만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혹은 가슴절절한 연애 이야기를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작가는 소설 중간중간 끼어들면서 소설 속 등장인물을 향한 감정이입을 적절하게 방해한다. 대신 작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추억을 강요한다. 소설 속에서 나 아멜리는 린리를 통하여 습득한 일본어를 가지고 취직한 회사에서 소설 <두려움과 떨림>의 모티브가 된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고, 린리의 사랑 속에서 작가의 처녀작인 <살인자의 건강법>을 열심히 집필한다. 그렇게 소설은 소설 속의 아멜리와 소설을 쓰고 있는 아멜리를 오락가락 한다.
“달아나는 것은 그리 영광스럽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달아나는 것은 너무나 기분이 좋다. 도망은 가장 아찔한 자유의 느낌을 준다. 달아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을 때보다 달아남으로써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느낀다...”
결국 린리와의 ‘코이’ 대신 자유를 향한 열정 혹은 소설을 향한 애정을 선택한 나 아멜리는 벨기에의 언니 곁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일년 육개월에 걸쳐 <살인자의 건강법>을 집필하고 결국 출간을 하게 되며, 그 사이 일본의 린리와는 띄엄띄엄 소식을 주고 받다가 결국 아무 소식도 주고받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소설책의 저자로 다시금 일본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린리와 재회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무라이식 우애의 포옹으로 재회의 기쁨을 대신한다.
“... 나는 사람들이 관계를 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추할뿐더러 사실이 아니다. 결코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더는 생각하지 않을 때조차 그의 즉자적 현존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한 번 소중했던 사람은 영원히 소중하다.”
그렇게 이제 막 성인이 된 이가 느꼈을 법한 다양한 감정들에서는 우리가 그 시절 이후로 맺게 되는 모든 관계들의 잉태가 느껴지고, 그 혹은 그녀가 내리는 아슬아슬하지만 확고한 결정들에서는 우리들 삶을 지탱해줄 모든 판단의 탯줄이 느껴진다. 어깨에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또 다른 힘을 느끼게 만드는 작가의 유연함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다.
아멜리 노통브 / 이상해 역 / 아담도 이브도 없는 (Ni d'Eve ni d'Adam) / 문학세계사 / 240쪽 / 2008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