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Nov 21. 2024

아르토 파실린나 《웃는 암소들의 여름》

치매 노인과 택시기사 사이의 가식없는 핀란드식 훈풍...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소설은 나오기 힘들겠군, 하는 생각때문이라고나 할까. 소설은 치매에 걸린 노인 뢰트쾨넨과 우연히 동행하게 된 택시기사 소르요넨의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소설은 핀란드라는 나라를 여행하는 두 남자의 여정으로 채워져 있으면서, 동시에 변함없는 풍광을 지니고 있는 나라, 그리고 치매 걸린 노인의 뇌리에서조차 지워지지 않으려 하는 다양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하고 파헤쳐지고, 메워지고, 물에 잠기기도 하고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기도 하고, 고공행진을 하다가 폭삭 주저 앉고, 도로가 깔아뭉개고 지나가고 터널이 뚫고 지나가고, 강바닥이 드러내어지고 강의 길이 바뀌고 굴곡있어 정감도 따르던 강둑은 싹둑싹둑 정렬되어가야만 유지될 것 같은, 혹은 그러하다고 강변하는 자를 대통령으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는 도통 발굴되기 힘든 소설이라고 밖에... 

 

  “... 그는 자신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도 다시 알게 되었다. 그는 오래전에 이러한 것을 예측했어야만 했다. 이제는 이 모든 것, 그의 삶 전체가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이러한 분명함과 선명함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슬그머니 엄습했다. 기억상실이 또다시 자신을 덮칠 거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니까 이 치매걸린 노인이 걱정하는 기억상실과 소설을 읽는 내가 걱정하는 바는 다른 듯하지만 비슷하다. 노인의 경우 세상은 그나마 그대로인데 자신이 기억을 잃어가는 대신, 나의 경우 나의 기억은 아직 정정하기만 한데 나의 기억 속에 지그시 자리잡고 있는 장소들이 (더불어 추억들까지도) 변형되거나 소실되어 버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 부자의 돈은 가난한 사람의 돈보다 영향력이 크고, 가난한 사람의 돈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드물다. 가난한 사람이 뭔가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면 틀림없이 돈을 잃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가난할 리가 없을 것이다.” 

 

  핀란드 특유의 (라는 건 그저 내 생각이지만) 느긋한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때때로 촌철살인의 문장을 쏘아대는 작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는 두 사람의 행적은 그러나 (그러니까 소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리네 삽질 정권에 대한 짜증에도 불구하고) 꽤나 유쾌하다. 느닷없는 손님을 위해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 택시기사, 그리고 두 사람이 여행길에 만나는 사람들 모두는 선하기만 하다. 

 

  “그렇게 다시 새 날이 밝았다. 그날은 여섯 번재이자 마지막 파괴의 날이었다. 하느님은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했다. 매키탈로의 신(新) 이주자 농장 역시 엿새 동안에 파괴되었다.” 

 

  심지어 나라로부터 제공받았고 평생을 바쳐서 일구었던 자신의 땅을 나라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싫어 철저하게 파괴해버리는 치매 노인의 전우인 전차병 마저도 노인답지 않은 좌충우돌식의 행동과 성격으로 독자를 즐겁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파괴된 농장으로부터 벗어난 소들을 추적하며 이들이 벌이는 식도락, 그리고 이 어설픈 카니발에 동참한 외국인들까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뢰트쾨넨은 여름 내내 자신을 도와준 소르요넨에게 수고비와 경비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소르요넨은 이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우정 때문에 측량위원과 함께 돌아다닌 거라고, 잘 생각해보면 우정이란 자연이 대가 없이 준 선물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갈되지 않을 만큼의 우정을 가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치매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좌충우돌 노인 뢰트쾨넨과 우직하고 선하기 그지없는 택시기사 소르요넨의 조금은 뜬금없는 우정만끽 여행은 끝이 난다. 그리고 이제 소망해본다. 작가의 손끝에서 풍성하게 넘쳐나는 핀란드의 자연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풍성함이 유지되 수 있기를, 그리고 이러한 자연에 대한 묘사와 함께 어우러지는 인간 군상들 또한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는 이 핀란드 작가처럼 우리의 자연과 제대로 어우러지는 우리들을 우리의 작가들도 그려주기를 말이다. 

 

 

아르토 파실린나 / 정현규 역 / 웃는 암소들의 여름 / 쿠오레 / 241쪽 / 2008 (199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