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된 공간, 한정된 인물이 뿜어내는 현란한 이야기의 향연...
간간이 연극을 보러 다닌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취미 생활에 슬쩍 편승한 격이지만 그리 싫지는 않다. 그러니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연극으로 각색하기에 아주 적당한 걸, 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소설은 제한된 장소에서 한정된 인물만으로도 매우 훌륭하게 진중하기 그지없는 주제 의식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표현해내고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850년대 초이고 지리적 배경은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는 이탈리이다. 하지만 이처럼 엇비슷한 연대와 실제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따오기는 했으되 역사적 고증이 철저한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임의로 실제하는 사실들과 자신이 만들어놓은 허구를 뒤섞어 놓았다. 그리고 여기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섬에 갇힌 네 명의 인물이 있다. 남작 가문 출신의 인가푸, 자칭 시인이면서 선동가로 알려진 살림베니, 군인 출신의 아제실라오, 학생이라고만 알려진 이들 중 가장 연약해보이는 나르시스는 어느 날 드디어 자신들이 죽음의 문턱에 당도했음을 통보받는다.
“... 너희들 두목 이름을 대라. 알아둘 것은 나는 너희에게 신념을 배신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단지 사람 하나를 배신하면 된다. 누가 배신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도 모르게 할 것이다. 철저히 비밀로 감춰지기 때문에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 수치심에 대한 보상으로... 너희 모두를 사면하고 아르헨티나 식민지로 추방시켜주겠다... 하룻밤이 남았다. 그 여덟 시간 동안 목숨을 구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헛된 영광을 쫓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아라... 조금 이따 그곳에 가면... 탁자 위에 놓인 네 개의 백지를 보게 될 것이다... 거부를 뜻하는 가새표를 하든다, 아니면 내가 너희들에게 물은 이름을 적어 넣으면 된다... 가새표가 그려진 종이가 네 개라면 너희들은 죽게 된다. 반대로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개라도 이름이 적혀 있다면, 네 사람 모두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총잡이로 불리우며 지방의 총독이자 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사령관은 이들에게 다음 날까지 여덟 시간 동안 자신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무기명으로 투표를 하되, ‘불멸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배후의 인물을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종이에 적는다면 모두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것은 창 밖에서 단두대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거부하기 힘든 제안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함락하기 힘든 대의명분을 의식한 사령관은 죽음을 앞둔 이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그 안에 치릴로 신부라고 불리우는 또다른 반정부 인사를 투입한다. 그리고 이 치릴로 신부를 이용하여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에 대한 열정을 뒤돌아보게 만들고, 그리하여 삶에 대한 필연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또다른 전략까지 구사한다.
(여기부터는 부득불 스포일러가 투입되니 소설을 읽으실 요량이라면 여기서 멈추거나 두 단락쯤 건너 뛰시라...)
그리고 연이어 폭발하는 반전들... 이들 네 사람은 자신들의 옛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도 결국은 아무도 ‘불멸의 신’의 이름을 적지 않은 채 투표함에 종이를 투여함으로써 스스로 목이 잘리는 단두대에서의 형벌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가낭 연약해보이던 나르시스는 함께 있던 신부에게 그만 ‘불멸의 신’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유약함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 치릴로 신부의 정체가 밝혀지고 소설은 또 한 번의 반전을 획득한다. 이미 투표함에 백지를 넣었기에 이들의 죽음은 기정사실화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들을 살릴 수도 있었을 ‘불멸의 신’의 정체는 노출되는 어이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소설 내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유지시키던 상황이 어이없게 결말이 나는 순간,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준비해 놓은 비장의 반전을 우리들 앞에 짜잔, 등장시킨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인간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실제인가 가짜인가? 종이로 만든 허구, 신의 모습을 닮은 허상, 재로 만든 팬터마임 무대에 등장한 실재하지 않는 존재, 적의를 품은 마술사가 빨대로 불어대는 비눗방울?”
실제하는 역사와 이를 살짝 비틀어 놓은 작가가 쓰는 역사처럼 우리가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비틀려진 진실에 대하여 이처러 절묘하게 소설로 만들 수 있을까. 우리들 내면의 우유부단함이 뿜어내는 속내에는 또다른 형태의 강인한 의지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독하게 뿜어낼 수 있을까. 지금 바로 무대로 옮겨져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이 범상치 않은 작가의 소설에는 물리치기 힘든 특별함이 있다.
제수알도 부팔리노 / 이승수 역 / 그날 밤의 거짓말 (Le Menzogne Della Notte, Night's Lies) / 이레 / 2008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