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실명의 공포가 만들어내는 선과 악을 똑똑히 보라...
*2008년 12월 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두려움에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천지에 두고서도 읽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아뿔싸, 제때 읽고 느꼈어야 했는데 하는 안타까움이 스멀스멀한다. 상당히 문학적이지만 터무니 없으면서도 탄탄한 상상력의 탁월한 대중성 또한 가지고 있다며 작가의 소설을 일독할 것을 권했던 아내에게도 미안하고... (아내는 이번 일본 출장길에는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를 들고 갔다.)
하지만 왠지 영화의 개봉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관람 전에 소설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를 향하여 쏟아지는 소설을 따라가는데 급급하였지 소설을 넘어서지는 (혹은 소설에 버금가지도) 못했다는 평들 탓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소설은 어떻기에, 라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소름이 끼치는데, 이러한 영화의 시니컬한 풍성함조차 소설에 빗대면 별점을 허물어 가야 할 정도라니 말이다.
영화는 한 동양 출신의 남성이 운전을 하는 중 갑작스레 시력을 잃으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시력을 잃은 그를 대신하여 차를 몰아 그의 집에 데려다 주었던 (하지만 그의 차를 몰고 사라져버린) 좀도둑, 시력을 잃은 남편을 병원에 데리고 갔던 그의 아내, 그가 진찰을 받았던 병원에서 함께 진찰을 받았던 어린 소년, 병원에서 그를 도왔던 간호사와 그를 진찰하고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였던 의사까지 그와의 접촉 순서에 따라 모두들 시력을 잃어간다.
이처럼 일종의 전염에 의한 실명이 도시로 퍼져가는 동안 공포 또한 퍼져나가고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도시의 한 귀퉁이에 마련된 병동에 수용되고 바깥과의 접촉 자체가 차단된다. 그리고 이제 도시 속의 작은 도시가 되어버린 눈먼 자들의 병동은 그야말로 인간이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살아있는 지옥으로 칭해질만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제1병동의 왕으로 군림하는 눈먼 자는 (오호 통재라,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게바라 씨가 살아 있는 악마로 분하다니...) 손에 들린 총 한 자루로, 그리고 이미 눈이 멀어 있던 자를 수하로 이용하며 (이미 눈먼 경험을 하고 있던 그는 이제 막 눈이 먼 다른 신참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숙함을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그곳을 점점 지옥으로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는 단 한 명,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여인이 있다. 모두가 시력을 잃어가는 동안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남은 그녀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병동에서 악에 물들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홀로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녀에게만 시력을 남겨둔 것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실 영화의 중반부에서 가슴이 덜덜 떨리고 손아귀에 힘이 가도록 만들었던 지옥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줄리언 무어에게 의지한 채 먹을 것을 위하여 한 줄로 걸어가는 눈먼 여자들과 이어지는 지옥의 풍경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환호하고, 서로의 몸을 씻겨주며 행복에 겨워하는 눈먼 자들이 없었다면 영화는 그야말로 하드코어와 하드고어가 결합된 호러물에 가까웠을 것이다.
빛으로 넘쳐나는 세상은 여전하지만 그곳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우리들 모두가 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영화는 (소설은) 멀쩡한 시력을 가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치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어둠을 통하여 더욱 선명해지는 빛처럼, 시력을 잃되 암흑이 아니라 너무 강한 백색에 맞닥뜨려야 하는 눈먼 자들은 그제야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영화에 대해 신랄한 평가가 내려지고는 있지만 아직 책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옆에 『눈먼 자들의 도시』를 꺼내놨다. 읽던 책을 멈추고 이 책을 먼저 읽을 생각이다.)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영화로도 (나에게는) 충분하게 주제 사라마구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고 말해야겠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곳을 들여다보았다는 공포는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보여주는 희열의 표정은 여전히 희망적이고 따스하지 않은가.
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 줄리안 무어,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대니 글로버 출연 / 120분 / 2008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