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 컬처의 무한 확장에 덩달아 몸을 싣고...
젊은 소설의 소재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반가운 작품들이 실려 있다. 랩 음악의 버전으로 소설을 써낸 이기호의 〈버니〉가 등장한 것이 1999년이고, 이후 대중 문화를 소재로 사용한 작품들이 종종 등장하기는 하였다. 그리고 김기태의 소설들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더욱 나아가서 닿을 곳이 어디인지 지금까지는 꽤나 궁금하다.
「세상 모든 바다」
이런 소설도 나올 법하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바다’ 줄여서 ‘세모바’라고 부르는 아이돌(이지만 아이돌을 뛰어 넘는)의 팬인 나를 다루는 그런 이야기... 물론 비슷한 소설들이 몇 편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건 좀더 본격적이다. 아이돌을 뛰어넘는 아이돌이 지향하는 바, 그러한 아이돌의 팬으로서 갖게 되는 여러 감정, 팬들 사이의 소통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이 다뤄지고 있다.
「롤링 선더 러브」
“이를테면 그 블로그는 섣불리 사버린 선물과 수신인을 잃어버린 편지, 고장난 장난감과 짝을 잃은 액세서리의 수납함, 고대의 맹희가 건축하고 현대의 맹희가 낙서하는 사적인 유적지였다...” (p.46) 지금 당장의 대중 문화에 집중하는 작가가 이번 소설에서 채집한 것은 〈솔로농장〉이라고 이름 붙인 가상의 연애 프로그램이다.
「전조등」
“무럭무럭 자라날 아기를 고려해 더 큰 집을 구했다. 이사하면서 구청 수영 대회에서 받은 동메달은 챙겼지만 목공방에서 만든 스툴은 버렸다. 젊은 때 입던 옷가지의 반 정도를 기부했고 오래된 전자기기 몇 가지를 폐기 업체에 넘겼다. 그중 노트북에는 블랙박스 영상이 저장되어 있었지만 그는 이미 잊은 뒤였다...” (p.106) 프러포즈와 꺼진 전조등의 사이 어딘가에 끼어버린 남자 같다, 같지만, 이런 남자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책으로 연애를 배웠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 어딘가에서 잠자코 그 외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감정의 서선이랄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체르노비치의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추궁받았다. 왜 혁명을 선동하는 삐라를 뿌렸냐고. 그 이유를 대라고. 그녀는 일이서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판사가 제지하자 그녀는 더욱 매섭게 외쳤다.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인터내셔널이오!‘ (p.135)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인터내셔널가를 찾아 들었다. 인터내셔널은 글로벌에 자리를 내주고, 노동은 금융에 잠식당한 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어떠한 굴레 아래에서도 살아간다, 살아가야만 한다.
「보편 교양」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한 인성을 형성하며, 학문이나 직업 활동에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고, 읽기는 물론 말하기와 글쓰기 등 통합적인 국어 능력의 향상을 꾀한다.’ (pp.152~153) 고등학교 선생님인 곽은 ‘고전읽기’라는 3학년 선택 과목을 개설하면서 위와 같은 과목의 취지를 염두에 둔다. 하지만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그다지 그러한 취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수업을 들은 ‘은재’라는 학생을 통하여 곽 그리고 곽이 만들고 운영한 과목은 일말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로나, 우리의 별」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된 로나는 스스로를 이미지 매이킹하면서 아티스트로 발돋움하였다. 이후 ‘대중성과 예술성 양며네서 인정받는 뮤지션’으로, 그리고 음원 플랫폼을 통하여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로나는 스스로가 대중 속으로 소모되지 않는 방식으로 버전 업시켰으나 데릭 윤이라는 기업가와 결혼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와 결별한 다음 로니는 이제 드디어 정당 창당에 나서고, 언론은 ‘좌충우돌’과 ‘모순’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을 향하여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외다리비둘기’, ‘아로미’, ‘제플린88’, ‘똑딱이단추’, ‘배부른소크라테스’, ‘목련러너’, ‘까망쥐’, ‘잉맨’, 사축A’, ‘빵또아’, ‘붕어싸이코’, ‘당근도기립하시오’와 같은 이들이 로나의 동지로 있었다.
「태엽은 12와 1/2 바퀴」
낡은 여관이었다가 새롭게 게스트하우스로 리뉴얼하였지만, 딸은 장성하여 그곳을 떠나 때때로 들를 뿐이지만, 죽은 아내와 함께 했던 그곳에 그는 여전히 있다, 낡은 괘종시계와 함께. 그리고 그곳에 오래 전 여관이던 시절에 신혼 여행의 장본인으로 들렀던 남자가 방문하고, 그는 자신이 묵었던 방에 비닐봉지를 남겨둔 채 떠나고, 나는 그런 그를 붙잡아 비닐봉지를 돌려주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저는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깜빡한 거라도 쳐주십시오.“
「무겁고 높은」
”빈 봉을 쏘아올리며 한 계절을 보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였다가 뜯어지고 다시 박일 때쯤 봉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체의 힘이 봉에 제대로 전달됐을 때 울리는, ‘탕’하는 경쾌한 소리. 뒤따라 손안에서 느껴지는 봉의 떨림. 아무도 없을 때는 더 작은 소리들도 들을 수 있었다. 진동하는 봉 안에서 작은 링과 티끌 같은 것들이 구르며 내는 메아리. 쌀을 부어넣은 페트병, 아버지가 흔드는 은단통, 혹은 수학여행지의 바다에서 들었던, 파도가 쓸어가는 굵은 모래 소리.“ (p.246) 한때 번성하였던 탄광촌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 합법적인 도박장이 들어선, 익히 알 것 같은 그곳의 학교에 역도부가 있고, 그 역도부에 송희가 있다. 쇠락한 것들 그리하여 체념한 것들 그래서 아무런 색도 없는 풍경만이 남은 그곳에서 햇빛에 반짝 하는 유리 조각 같았던 송희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팍스 아토미카」
“... 혹자는 지난 만 년 동안 인간은 모두 전사거나 전사의 유족으로 살았고, 20세기 전반에는 두 번의 총력전으로 팔천오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들은 화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2차 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 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 (p.292)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발행하는 회보의 표지에 등장하는 ‘지구 종말 시계The Doomsday Clock’에 의하면 2024년의 시계는 지구가 종말하는 자정으로부터 90초 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김기태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문학동네 / 331쪽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