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되거나 수신되어도 여전한 것의 정체...
90년대 처음으로 PC 통신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했다. 날짜가 잘 맞지 않아 아직 완공도 되지 않은 빌라의 원룸에 들어갔는데, 내가 살 그 집 혹은 그 방을 제외하고는 아직 공사도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전화가 들어올리 만무했고 전화선이 들어오지 않았으니 PC 통신을 할 수도 없었다. 물론 PC방이라는 것도 생기기 전이어서 그야말로 내게는 암흑 천지 같았다고나 할까.
나는 결국 그 암흑 속의 세상을 견디지 못하여 아직 공사중인 지하층에 있는 전화 코드를 찾아, 지하에서 일층 우리집의 컴퓨터까지 전화선을 길게 늘어뜨려서 기어이 PC 통신에 접속하였다. 난 이때를 위하여 구입한 커티샥을 잔에 따라 흐뭇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들이켜며 PC 통신 속의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고, 그때 그렇게 만나던 친구들과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왕래를 하고 있다.
물론 세상은 바뀌었고 이제는 전자음을 들으며 근근이 통신망에 접속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무실에서는 컴퓨터를 켜는 순간 네이트온, 엠에스엔을 비롯해서 야후메신저에 심지어 KTF 메신저까지 동시에 네 개의 메신저에 로그온이 되어 버리고, 그 순간 컴퓨터 앞에 찾아 있는 친구들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것뿐인가 네이버 블로그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는 실시간으로 방문자수가 체크되고 친구들이 남겨놓은 안부글이나 방명록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오래전 원룸에서의 그 순간, 며칠만에 접속한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의 벅찬 가슴이 오히려 그리워지고는 한다. 어차피 문명화된 디지털 세계였던 십여 년 전을 두고 무슨 낭만 타령이냐 싶지만, 지금과 비교하여 당시의 통신 세상에는 지금과는 또 다른 아슴프레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온 소설 한 권을 읽고 있자니 그때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소설은 삼십을 넘은 두 남녀가 주고 받은 이메일로만 구성되어 있다. 설령 잘못 발송된 이메일일지언정 그렇게 서로를 확인하였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만남으로 구성된 소설이 시작되겠지, 하는 예측은 어긋나고 만다. 소설은 그저 에미 로트너와 레오 라이케 두 사람이 몇 분 간격 혹은 며칠 간격으로 주고 받는 이메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때로는 몇 페이지의 장문 편지 또 때로는 한 줄의 외침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소설의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마주치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이름의 철자 하나를 잘못 적어서 엉뚱한 사람에게 배달된 에미 로트너의 구독사절 이메일에서 시작된 소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은밀한 로맨스로 이어진다. 잘못된 이메일을 전달받은 당사자인 레오 라이케는 에미 로트너의 독특한 말투 혹은 이메일 형태에 호기심을 느끼고, 잘못된 이메일을 보낸 에미 로트너는 잘못된 이메일에도 재치있는 답변으로 답장을 대신할 줄 아는 레오 라이케에게 호감을 느낀다.
“... 우리가 한 것, 우리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든 것은 단 하나, 서로의 사적인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었어요. 당신은 나의, 나는 당신의 사적인 영역으로 파고들었죠. 어떻게 이 이상으로 깊이 파고들 수 있겠어요. 당신은 저랑 ‘사적인 영역에서’ 친밀해져 있음을 서서히 인정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두 사람은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메일을 통해서 서로의 감정을 처음에는 조금씩 그리고 결국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지경에 이르고, 실질적인 직접 대면을 피하기 위하여 ‘식별놀이’라는 것을 감행하고, 결국에는 대리인을 내세워 간접 대면이라는 방식을 취하면서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혹은 사랑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감정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제목 : 북풍
“... 레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어요. 제 감정이 모니터를 벗어난 거예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베른하르트는 그걸 알아차렸어요. 추워요. 북풍이 불어오고 있어요. 이제 우리 어떡하죠?”
10초 뒤
Aw :
“주의. 변경된 이메일 주소입니다. 보내신 주소에서 수신자가 메일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도구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사람 사이에서 교감되는 감정에는 변화가 없을 터이다. 소설은 현대인들이 핑계로 삼고 있는 감정 교류의 근원적인 방해 요소들인 디지털 기기 혹은 디지털 문명의 잔재를 깊숙이 끌어들이면서도, 결국 이 모든 것들의 근원에 우리들 자신이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획기적인 문명의 책임만은 아니다.
다니엘 글라타우어 / 김라합 역 /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Gut Gegen Nordwind) / 문학동네 / 382쪽 / 2006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