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실실 상상력이 뿜어내는 각양각색 악기 소리...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살면 좋겠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아니야 그러지 말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시간 동안만큼만 생각을 하면 어떨까. 아니 그러지 말고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누군가의 의뢰를 받은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한 다음 그 생각을 팔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다, 가끔 소설 책이나 읽으면서 남의 생각이나 엿보며 유유자적 살아야겠다.
「자동피아노」.
“음악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음악이 있습니다. 그 음악들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꽤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인 나는 어느 날 절대 얼굴을 알리지 않는 (게다가 연주회에도 가본 적이 없는) 피아니스트인 비토 제네비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그와 연락을 하게 되고 서로 핸드폰을 통하여 서로의 음악을 들려주며 가까워지게 된다. 예술가와 예술의 사이, ‘예술가란... 자신의 몸을 통째로 예술에게 빌려줘야 한다’라고 생각하였던 한 예술가와 그러한 예술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덕분에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은 한 예술가의 이야기...
「매뉴얼 제너레이션」.
“지구촌 플레이어를 사용할 때의 주의사항은, 지구를 사용할 때의 주의사항과 똑같습니다... 첫째, 분해하지 마십시오. 둘째, 고온의 장소에 보관하지 마십시오. 셋째,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구를 만들어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구를 함부로 집어던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 넘쳐나는 제품들, 그리고 딱 그 넘쳐나는 제품들의 숫자 만큼일 매뉴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문적으로 매뉴얼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 매뉴얼을 의뢰한 회사에서 만든 매뉴얼 전문 잡지의 발간을 도맡고, 그러다가 매뉴얼을 추억하는 또다른 방식도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는 매뉴얼 제너레이션이라고 할만한 나의 이야기이다.
「비닐광시대」.
“... 이 사람들의 음악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또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가 그 수많은 밑그림 위에다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예전의 디제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여러 앨범을 자유자재로 붙이고 자르고 연결하고 다듬고 긁으며 새롭게 음악을 만드는 디제잉 작업을 공부하는 내가 겪었던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해프닝을 통하여 나는 새로운 비트를 느낄 수 있는 심장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악기들의 도서관」.
“... 자동차에 부딪혀 몸이 허공으로 치솟던 순간, 머리 속에 그 문장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생각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라는 문장이 두꺼운 헬멧처럼 내 머리를 감쌌다... 죽지 않았던 것은 그 문장 덕분이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정말 그 문장이 헬멧처럼 내 머리를 감싼 덕분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 자동차 사고를 당한 이후, 그러니까 그러한 사고를 당한 이후에도 생을 부지할 수 있게 된 이후, 나를 사로잡은 하나의 문장을 부여잡은 채 살아가다가 얻게 된 악기점 아르바이트... 그리고 나는 그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 무수히 많은 악기들의 소리만을 녹음하고 빌려주는 ‘악기도서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는데...
「유리방패」.
“... 우리는 모든 요청을 거절하고 딱 하나만 받아들였다. 광고회사의 신입사원 면접관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면접이라면 자신 있었으니까...” 개그맨 시험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건만 항상 붙어 다니며 색다른 컨셉을 가미한 면접을 시도하며 지내던 나와 M은 어느 날 면접 후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장난을 치고, 그 장난이 사람들의 눈에 띄면서 매스컴을 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면접만 보러 다니던 이들은 면접관이라는 직업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일을 하게 되는데...
「나와 B」.
“... 매장에는 언제나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았다. 가끔 손님이 들어올 때면 매장 안을 어슬렁거리던 직원 서너 명이 곧장 달려가 가방을 받아들고 어깨를 안마해준 후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시킨다면 기꺼이 응할 태세로 손님을 바라보곤 했다...” 곧 망할 것 같은 음반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CD를 훔치던 기타리스트를 잡았다가 오히려 CD까지 한 장 들려주며 풀어주고, 곧 망할 것 같은 음반 매장이 드디어 망하자, 그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배우다가 햇빛 알레르기라는 새로운 병을 얻게 된 나의 이야기... ‘좋아한다면 두세 번은 시도해’ 봐야 한다는, CD 절도범에서 어엿한 기타리스트로 성장하는 총각의 말이 귓가에 남네...
「무방향 버스」- 리믹스, 「고아떤 뺑덕어멈」.
“믿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너도 버스 회사에서 일을 해보면 알겠지만 가끔 ‘무방향 버스’라는 게 생겨날 때가 있어. 똑같은 노선을 계속 반복하던 버스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지는 거야.” 제목에서 보여지듯 김소진의 단편 소설에서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의 첫 번째 부분), 그리고 마지막 두 문장을 빌려 전혀 새로운 소설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이 소설은 음악과 별 상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리믹스라는 음악적 기술을 사용했다는 면에서는 음악과 상관이 아예 없지는 않다) 평생 운영하던 구멍 가게를 떠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어머니를 찾는 과정에서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은 홀연히 사라지는 어머니 만큼이나 홀연히 사라지는 ‘무방향 버스’의 존재를 알아낸 것 정도...
「엇박자 D」.
“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20년 전 바로 그 노래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치들의 목소리로만 믹싱한 거니까 즐겁게 감상해줘.” 어린 시절 합창단에서의 만남 이후 이십여년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엇박자 D’라 불리웠던 동창의 등장... 그리고 공연 기획자로 자리를 잡은 나의 도움을 받아 이 음치였던 ‘엇박자 D'가 만들어낸 공연의 하이라이트... 고운 화음을 깨뜨리며 도드라지고 그로 인해 무시당할 운명을 지닌 음치, 그 음치들의 소리만으로 만들어낸 더빙 음악이 들려주는 신선한 충격의 이야기이다.
한 편을 제외한 모든 소설이 음악과 맥이 닿아 있다. 어디를 가나 끊임없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만큼이나 작가에게는 다양한 음악적 소재들이 있었나보다. 첫 번째 창작물인 『펭귄 뉴스』의 소설들만큼 흡족하지는 않지만 혀에 착착 감기는 문장과 날개 돋힌 상상력만큼은 미진하나마 여전하다. 이 작가의 장편 소설을 읽고 싶어진다.
김중혁 / 악기들의 도서관 / 문학동네 / 307쪽 / 2008
ps. 영화에 비유하자면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기 전에 일어서지 말라고 말해야 하려나. 길고 지루한 해설을 모두 넘기고 나면 맨 마지막에 김중혁스러운 작가의 말이 부록처럼 실려 있다. 디자인에 재주가 남다르다는 그가 직접 그렸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작가의 말을 그림과 더불어 확인할 수 있다. (뭐, 큰 기대를 할 것은 없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 크레딧 후에 얼핏 등장하는 짧은 장면들도 사실 그렇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