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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Dec 01. 2024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북유럽의 작가를 통해 길어올려진 저 깊은 이야기의 정수...

  아내의 거듭된 칭찬으로 마지못해 읽기 시작했지만 곧 푸욱 빠지게 되었다. 1800년대에 태어난 작가가 지금으로부터 오십여년 전에 발표한 고리타분한(?)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알 듯 모를 듯 한 발 두 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는 넉넉하고 곰살스러운가 하면, 새초롬하고 톡 쏘는 맛까지 가지고 있다. 세월의 켜 잔뜩 묻은 할머니의 치마폭 앞에서 듣는 묵지근한 이야기의 맛이 가득하다. 


  「바베트의 만찬」. 

  덴마크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바베트의 만찬>의 원작이 된 작품이다. 미국에서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당시 덴마크로부터는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했던 작가의 금의환향과도 같은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얼른 영화를 찾아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조금은 엄격한 종교 계파를 일으킨 목사의 두 딸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보낸 두 자매의 이야기와 함께 혁명이 한창이던 프랑스로부터 흘러들어와 두 자매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평생을 보낸 바베트... 


  “베를레보그 사람들은 잘 차린 음식을 먹을 때면 분위기가 진지했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달랐다. 먹고 마실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그들은 음식에 대해 잊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마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면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식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베트가 자신이 소유하게 된 돈을 이용하여 두 자매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놓은 음식, 그리고 이 음식을 통하여 그간의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잊고 있었던 스스로의 감각 혹은 감정 혹은 기억 혹은 추억을 되살려내는 사람들... 


  “... 그분이 제게 말씀하셨죠.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박수를 받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고요. 또 말씀하셨죠.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날 내버려둬달라는 외침뿐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라는 굉장히 철학스러운 물음을 향하여 바베트는 요리를 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통하여 초연하게 대답한다. 손 끝에 침묻혀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어느 새 그 손끝을 따라 바베트가 차린 성찬의 맛이 내 입까지 딸려 들어오는 듯하다.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의 맛을 지금 이렇게 이야기한들 무엇하랴, 명불허전이다... 


  「폭풍우」. 

  연극단을 이끌고 있는 쇠렌센과 연극의 조연으로 뽑히게 된 시골 처녀 말리... 어느 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연극을 시작한 말리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연기자의 생활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갑작스러운 사고가 생긴다. “... 시는 다듬어지지 않은 우리의 본성을 부드럽게 흔들어 고결하게 하고, 말이라는 보석에서 수다와 허풍과 험담을 걸러내니까.” 이동 중에 발생한 배사고와 그 현장에서 용감함의 진수를 보여준 말리는 배의 선주에게 초대되고, 그곳에서 그 선주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사고의 현장에서 함께 있던 청년의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뒤돌아선다. 


  「불멸의 이야기」. 

  바베트의 만찬에 버금가는 이야기의 성찬... 중국에서 큰 돈을 번 클레이 씨는 이제 엘리샤마로 하여금 회계 장부를 읽게 하고 그것을 들으며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더 이상 읽을 장부가 없게 되고, 스스로 오래전에 들은 뱃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데, 그것이 단초가 되어 이제 이 세상에는 없는 이야기를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야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만일 이 이야기가 없었던 일이라면, 이제 내가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하겠네. 난 허식도 싫고 예언도 싫어. 비현실적인 것들을 머릿속에 담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정신나간 짓이야. 난 사실이 좋아. 이 헛소리를 진짜 이야기로 만들겠네.” 

  여기에 과거 클레이 씨로부터 내침을 당한 집안의 딸이었던 비르지니가 끼어들게 되고, 클레이 씨 집으로 초대받은 선원과 비르지니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얹히면서 이야기는 탄력을 받은 수레바퀴처럼 힘차게 굴러나간다. 


  「진주조개잡이」.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올라 천사를 만나려 했던 젊은 신학도에게 정말로 나타난 천사... 하지만 이 천사는 신학도를 정말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의 실체를 밝히게 되고, 이 신학도는 자신이 생각한 천사가 실은 천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하고 만다. 

  “... 내가 잃어버린 건 그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천사에 대한 믿음이야. 지금 난 기억할 수도 없단다. 예전에 내가 상상했던 천사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천사에 대적하는 사람은 곧 신에 대적하는 사람이고, 신에 대적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 가는 희망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날 수가 없단다. 그래서 내 마음이 이렇게 헤매는 거란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꾼이 방문한 한 바닷가에서 이제는 늙어버린 과거의 이 신학도를 발견하게 되고, 이제 그를 통하여 우리는 그 뒷이야기를 듣게 된다. 

  “결국 인간은 시간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겁을 먹고, 과거와 미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균형을 잃고 말아요. 수중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모두 녹아 있는 말은 바로, ‘지금이 지나간 자리는 망각의 심연’이라는 말이지요.”  


  「반지」. 

  “반지는 그녀를 떠남으로써 그녀를 뭔가와 맺어주었다...” 다른 이야기들에 비하여 매우 짧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결혼의 실체를 알게 된 여인, 그리고 그러한 상황 인식의 배경이 된 살인자와 여인의 만남... 

  오랜만에 정말 이야기스러운 이야기들을 읽은 느낌이다. 하지만 작가의 히스토리를 읽어보면 (마치 저지 코진스키의 생애처럼 파란만장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그 거친 상상력의 기원을 넘겨짚게도 된다. 카렌 블릭센이라는 본명을 가진 작가 이자크 디네센은 덴마크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매독에 걸린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시련을 겪는다. 이후 한 남자와 결혼하여 남작 부인이 되고 나중에는 케냐의 커피 농장주가 된다. 그리고 이때 영국인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튼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그녀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책으로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를 통하여 연기되었다. 하지만 커피값의 폭락으로 농장을 팔고, 비행기 사고로 연인인 핀치 해튼을 잃은 그녀는 케냐를 떠나 뉴욕에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각광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1954년과 1957년 두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지만 첫 번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호오~) 두 번째는 알베르 카뮈에게 (하아~) 수상의 영광을 넘기게 된다. 


 

이자크 디네센 / 추미옥 역 / 바베트의 만찬 (Anecdotes of Destiny) / 문학동네 / 327쪽 / 200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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