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협곡을 경험하리라...
*2008년 6월 9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_미셸 에켐 드 몽테뉴 『수상록』제2권Ⅰ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_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1932년 12월 30일에 쓴 글
책의 서두에 적혀 있는 이 두 개의 발췌된 글귀만으로도 이 소설을 선택한 보람은 충분하다. 문득문득 나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협곡을 경험하고는 하는 나로서는 위의 두 글귀만큼 나의 의문의 정곡을 찌르는 문장을 근자에 본 적이 없다. 허투루하기 힘든 두 개의 발췌문 앞에서 한동안 멈춘 채 더 이상 독서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어중띤 공황의 시간을 경함한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게 조급하지 않게 아니 오히려 뒤로 엉덩이를 잔뜩 뺀 책읽기는 그러나 곧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라틴어에 그리스어, 그리고 헤브라이어에도 조예가 깊으며 해박한 지식으로 비록 고등학교 선생님임에도 대학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자신이 선생으로 있는 고등학교에서 마치 저 옛날 아인쉬타인처럼 정해진 일정에 따라 정해진 경로로만 움직이던 이 중년의 남자 그레고리우스가 느닷없이 자신의 일상에 뛰어든 한 여인에 의해 그간 쌓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이다.
“...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여인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무너진 일상을 부여잡은 채 고서점에 들르고, 그곳에서 그 여인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씌여진 헌책을 하나 집어 들게 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책의 저자에게 흠뻑 빠지고, 이 책의 저자의 흔적을 찾아 혹은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린 여인의 모국을 향하여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소설은 (마치 영화 <박하사탕>의 거꾸로 가는 기차처럼) 깊은 사색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오래된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열지만, 그 뒤의 일과 현재 일에 대해서는 문을 닫는 것...”
그렇게 스위스에서 포르투갈로 향한 물리적인 공간 이동의 여행은 리스본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 실업가인 실우베이라, 아마데우의 여동생들인 아드리아나와 멜로디, 아마데우가 사랑한 여인들인 마리앙 주앙과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조르지 그리고 그를 가르친 바 있는 바르톨로메우 신부를 통하여 시간 이동의 여행과 교묘하게 겹쳐진다.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사실 처음에 갖게된 사소한 호기심은 책의 서두를 지나자마자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그레고리우스의 입을 통하여 말해지는 부분은 그렇다치더라도 소설 속의 또다른 책자라고 할 수 있는 아마데우의 글 부분에서는 (인용부호 내부의 글들 중 기울임체로 되어 있는 부분들...) 두 손을 번쩍 들고 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포르투갈의 어두웠던 한 시절에, 바로 그 시절을 돌파하기에는 너무나 영민하였던 한 영혼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뇌는 절절하게도 각인된다.
“...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자란다. 분노는 들끓는 독과 같아서, 부드럽고 우아하며 평화로운 감정들을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잠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고, 우리를 빨아먹고 기운을 빼는 기생충처럼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분노에 분노를 터뜨린다. 우리가 입은 피해에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퍼져간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게다가 좋은 소설이 가져야 하는 덕목 중 하나인, 좋은 소설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떠한 때 어떠한 곳에서든 나름의 방식으로 유용하게 읽힐 수밖에 없다, 라는 덕목을 확인할 수 있는 위와 같은 대목은 또 어떠한가. 마치 지금 2008년 대한민국 잠 못드는 우리들을 눈앞에서 보고 쓴 것이라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다시 한 번 책의 서두 앞에서 망실인 것과 같은 공황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황이야말로 이 책이 가지는 독특한 장점이라고 할 수밖에...
파스칼 메르시어 (페터 비에리) / 전은경 역 / 리스본행 야간열차 (Nachtzug Nach Lissabon) / 들녘 / 전2권 (360쪽, 334쪽) / 2007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