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상을 향한 레이먼드 카버 식의 테러...
팽팽하게 펴져 있을 때는 알 수 없는 우리들 일상의 주름과 그 사이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일련의 시름들이 레이몬드 카버의 단문과 대화들을 통해 펼쳐진다. 화려하기 보다는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은 딱 그만큼 무미건조하기만 한 레이몬드 카버의 문체를 통하여 더욱 선명해진다.
(소설집에는 모두 열두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다섯편을 제외한 나머지 소설들은 예전에 읽은 집사재에서 나온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책자와 고스란히 겹친다.)
「깃털들」.
버드와 올라, 나와 프랜. 버드의 집에서 진행된 저녁 만찬. 조이라는 이름의 공작새와 과거의 올라의 흉했던 이빨을 구경하며 이들의 저녁 식사는 점점 흥미로워지고, 급기야 보기 드물게 흉칙한 버드와 올라의 아이 해럴드를 만나게 되면서 저녁 만찬은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와 아내는 정사를 나누고, 여전히 나와 프랜은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기억 속에서 이들의 현재는 아주 조금씩만 바뀐다.
「체프의 집」.
막다른 골목과 그 곳에서 찾는 위안. 하지만 그 위안마저 사라지려 할 때, 주인공인 웨스가 처한 현실은 보다 극명해지고, 이를 통한 정체성 확인의 기대치도 그만큼 커진다.
「보존」.
“석 달 전, 회사에서 잘린 뒤로 샌디의 남편은 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진 채 자신이 차지하고 앉은 소파에 영원히 머물러 버릴 것만 같은 남편... 그래서 그녀는 그가 걷고 있을 때조차도 ‘그 맨발이 부엌을 떠나 거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칸막이 객실」.
아내와 헤어질 따 아내를 선택했던 아들 마이어스를 수십년만에 만나러 가는 마이어스... 그리고 그 여행길 칸막이 객실 안에서 만난 사람들... 선로가 바뀌고 객실이 분리되는 것처럼, 우리들 인생의 순간순간에는 이러한 엇갈림과 단절의 순간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되어 버린 다음, 우리들이 그것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 것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생일날 아침 뺑소니 사고로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지고, 얼마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 그리고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케이크를 맞추었던 제과점과 그 제과점의 주인. 이들의 슬픔을 모르는 제과점 주인은 계속해서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 이들 부부에게 전화를 걸고 부부는 화를 참지 못해 제과점을 찾는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사과하는 제과점 주인. 예전에도 그랬지만 다시 읽어도 마음이 서늘해진다.
「비타민」.
인체에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비타민, 그 비타민을 파는 여자, 그리고 그와 같은 팀의 여직원과 남편. 건조하고 쌀쌀맞은 인물들의 약간은 의도적인 어리숙함과 숨겨진 날렵함이 좋다.
「조심」.
알콜중독증으로 고생한 전력이 있는 작가는 때때로 알콜에 찌든 인물들을 소설 속에 그리고는 한다. 일종의 강박에 시달리는 듯한 남자와 그 남자의 귀에서 무어가를 끄집어내려는 여자의 이야기...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알콜중독자를 치료하는 요양소에서 나와 JP가 나누는 서로의 일상에 대한 대화. 제목과 소설 내용의 아리송한 관계를 즐기는 듯 거개의 작품이 상당한 고도의 은유로 제목을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종종 그 관계의 접점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기차」.
단편보다는 엽편에 가까운... 방금 한 남자를 권총으로 위협했던 여자, 그리고 중년의 여자와 노인인 남자... 새벽 아무도 없는 기차역에서 만난 이들의 무미건조한 행동 혹은 이들이 올라탄 기차의 사람들이 보이는 무반응이라는 반응에 대하여...
「열」.
사건의 스피디한 진행. 다른 사람을 따라 남편을 버리고 집을 떠난 아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남편에게 아내는 전화를 걸어 웹스터 부인이라는 유모를 구해주고 자신과 남편이 처한 현실이 그릇되지 않은 운명임을 전화로 설명한다. 인생에 순응하는 법, 그리고 그 후견인같은 열병의 존재.
「굴레」.
말의 입에 물리고 그것을 통해 마부가 말을 이리저리 이끄는 말굴레... 고향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말굴레만을 가지고 도시의 한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던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이 떠나면서 아파트에 남겨 놓은 말굴레... 어쩌면 이제야말로 이들은 자신들의 입에 물려졌던 재갈을 풀 수 있을 것인가...
「대성당」.
아내의 오랜 친구인 장님 로버트의 방문. 그에게 호감을 갖지 못한 채 빈정거림을 멈추지 못하는 나. 하지만 로버트에게 티비 속 대성당의 모양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나와 그런 나의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려나가도록 돕는 로버트 사이의 감응. 단계적인 사건의 진행과 아쉬운 듯 운치가 있는 결말 등 단편소설의 미덕이 잘 반영되어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유명세에 비하여 내 입맛에 썩 맞지는 않는다. 전혀 힘들이지 않은 간결함으로 일상의 주름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이제 막 도래한 우리들 중산층의 핏기 빠진 일상과 겹치면 허심탄회하게 마음 내어주기가 힘들다.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들의 열정 혹은 김이 빠진 채로 묵묵히 냉장되고 있는 듯한 우리들의 마음을 들켜버린 느낌이다. 어딘가 찝찝하다.
레이먼드 카버 / 김연수 역 / 대성당 (Cathedral) / 문학동네 / 366쪽 / 2007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