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자신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평생 살아가지만...
사람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소설 중 재미있는 것들이 간혹 발견되곤 한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존 어빙의 《가아프가 본 세상》처럼 이름과 또다른 명사가 함께 제목을 이루기도 하지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토니 모리슨의 《술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처럼 아예 이름만으로 제목을 삼기도 한다. 번역 제목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의 원제는 ‘Elizabeth Finch 엘리자베스 핀치’이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익숙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p.42)
소설은 20대 말에서 40대 초반의 수강생들 그리고 이들 앞에서 ‘문화와 문명’이라는 강의를 진행하는 엘리자베스 핀치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로 치자면 평생 교육원 같은 것일까, 아니면 강의의 특성상 나이 어린 학부생이 배제된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소설의 서술자인 나(닐)는 엘리자베스 핀치(이후 EF)의 수강생들 중 한 명인데, 나와 EF의 관계는 이후 EF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쩌면 그 이후까지도 계속된다.
“우리의 점심은 거의 20년 동안 계속되어 내 삶의 고요하고 빛나는 지점이 되었다. 그녀가 날짜를 제안하면 나는 늘 그 시간을 비우곤 했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아,우리 둘 다 나이가 들면서―흔한 병과 작은 사고에 시달렸으나 늘 그것은 가볍게 넘겼다. 나에게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옷에서나 대화에서나 식욕에서나(소식이었다) 흡연에서나(굳건했다)...” (p.80)
EF가 죽고 나에게는 EF가 작성한 노트 등이 남겨진다. 그리고 두 번째 챕터는 내가 EF를 회상하면서 동시에 로마의 배교자 황제로 유명한 율리아누스와 관련한 여러 저작물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율리아누스는 로마의 황제 중 기독교를 믿지 않은 마지막 황제이면서 당시에 대세로 자리잡은 기독교 대신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교로의 회귀를 도모하였던 황제이다. 그래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후대에 지칭되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갑자기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합당한 핑계가 있었다. 나는 EF의 제자 가운데 하나로 그녀와 계속 연락을 해왔다. 나는 짧은 전기를 쓸 게획인데, 그건 그녀가 내 평생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라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pp.220~221)
하지만 번즈는 나의 목소리를 빌려 율리아누스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가진 종교의 폐쇄성 등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령을 내린 율리아누스야말로 관용의 정신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그저 기독교를 배신한 로마의 황제로서 배척되었던 율리아누스는 오히려 근대에 들어 희곡의 소재가 되는 등 여러 작가에 의하여 (이번에는 줄리언 반스에 의하여)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다.
“... 나는 엘리자베스 핀치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고 상당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한다, 무덤 너머에서...” (p.238)
율리아누스를 다층적으로 복귀시키는 문필가들의 제스처는 엘리자베스 핀치의 죽음 이후 그녀의 뒤를 밟는(?) 닐의 행동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나’가 있다. 어떤 이는 평생에 걸쳐 나를 알리기 위해 살아가지만 또 다른 이는 똑같은 시간 동안 자신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핀치는 후자였고, 소설은 그런 그녀를 죽음 이후에 더욱 가까이 따라 간다.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 정영목 역 /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Elizabeth Finch) / 다산책방 / 302쪽 / 2024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