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십여 년 전 기억 속의 시간을 걷는다...
느닷없이 선배가 전화를 하여 책을 한 권 선물하겠다고 했고,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감사하게 그 책을 선물받았다. 배달된 책은 이제나 저제나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훌쩍 한 달여가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이사를 하였고 뜬금없는 술집 출입으로 조금은 황폐해졌다. 술에 취해 기억은 못할지언정 그 중 어느 날은 달조차 뜨지 않은 하늘을 향해 검은 입을 벌려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도 냈을 법하다.
우여곡절 끝에 집어든 책을 주섬주섬 펼치자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주옥같은 이십여 년 전의 추억만 새록새록 떠올랐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니체와 숨막히는 심리전을 펼치는 의사 요제프 브로이어인데도 나는 계속 요제프에게 니체를 소개하는 짧은 순간의 루 살로메에게만 시신을 쏟아내고 있다. 사실 내게 책을 선물한 이는 대학 일학년 시절 루 살로메의 현현인 듯 여겼던 누나였다.
1988년 가을, 루 살로메와 니체, 그리고 파울 레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야말로 파괴적이지만 가장 전위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던 나는 착하디 착한 동기를 꼬셔 석계역 근처로 달려갔고, 그때마다 누나는 잠옷인지 외출복이지 모를 옷을 입은 채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묘한 눈빛으로 우리의 호출을 받아들였으며, 역 앞의 포장마차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술값을 지불하였고, 우리는 누나네집 근처의 놀이터에서 밤새 이슬을 맞으면서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년이 흘렀고, 언제나 느닷없었던 나는 느닷없는 누나의 책 선물을 얌전하게 받아들였다는.... 그런...
“... 니체의 모습은 살로메의 얘기를 듣고 추측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키는 대략 175센티미터, 몸무게는 68에서 72킬로그램 정도 되어 보였다. 그의 몸은 기이하리만큼 실체가 없어서 마치 손으로 꾹 누르면 관통할 것만 같았다...”
소설은 1882년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고 이러한 니체를 루 살로메로부터 소개받아 치료하고자 하였던 심리학 혹은 정신병리학의 선구자였던 요제프 브로이어 사이에 벌어진 밀고 당기는 치료하기 혹은 치료받기의 이야기이다. (사실 책의 앞부분 루 살로메가 등장할 때 살짝 흥분하였는데, 웬걸 소설에서 루 살로메는 저저저저저 먼 곁가지일 뿐이다.)
“거룩한 것은 진실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입니다! 자기를 탐구하는 것보다 더욱 신성한 행위가 있습니까? 제 철학적인 작업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반박하겠지요. 제 입장은 지속적으로 바뀌니까요. 그렇지만 화강암처럼 단단한 문장이 하나 있어요. 바로 ‘너 자신이 돼라.’는 겁니다. 진실 없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철저하게 문을 닫은 듯한 니체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낀 요제프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를 치료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지만 여의치 않다. 오히려 니체로부터 내침을 당한 요제프가 좌절하려는 찰나 니체에게 다시 한 번 극심한 고통의 경련이 찾아오고,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그때까지는 아무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살아 있을 때 살아라! 삶을 최대한 누릴 때 죽는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올바른 때에 살지 못하면 올바른 때 죽지도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을 두 사람은 서서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굴레 (요제프 보로이어에게는 베르타라는 여성 혹은 아내인 마틸더라는 굴레, 프리드리히 니체에게는 루 살로메라는 여성 혹은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라는 굴레) 를 극복해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와 정신분석학자가 펼치는 심리전은 나긋나긋하게 진행되지는 않지만 충분히 흥미롭다.
『몇 년 전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는 앙드레 지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역사는 일어났던 허구다. 반면 허구는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역사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 나는 이렇게 적었다.
허구는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역사다. 그렇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허구다. 내 소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는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심리치료 분야에서 일어나는 있을 법하지 않은 내력들을 참조해보건대, 이 책에 나온 모든 사건들은 역사가 역사의 축으로부터 약간만 회전했다면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얄롬 리더》, BasicBooks, NY, 1998).』
세계 최고의 전기작가인 츠바이크에 필적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빈 얄롬은 니체에 대한 츠바이크의 전기의 도움도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밝히고 있듯 알려진 역사와 역사 그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우리들이 알고자 하여도 알 수 없는 그 미지의 틈으로 사색의 펜을 들이미는 작가는, 그 틈을 벌리고 또 벌리는 고단한 작업을 통해 안에서 화려한 허구로서의 소설을 활짝 건져 올렸다.
어빈 얄롬 / 임옥희 역 /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When nietzche wept) / 리더스북 / 588쪽 / 2006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