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아득한 이야기의 버석거리는 향연...
편혜영 「포도밭 묘지」
“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 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p.34) 이런저런 이유로 상고를 선택했던 이들이 졸업을 하고, 조금 나은 직장에 다니거나 조금 못한 직장에 다니거나 하면서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그러다 한 명의 친구가 죽고 그 기일에 그 친구를 찾아 가는 길에, 형태만 남은 포도밭을 지나간다. 형태만 남은 포도밭, 이라고 쓰고 보니 이들의 포도향 가득하였던 시절이 아득히 멀어 보인다.
김연수 「진주의 결말」
“...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p.68) 이 발췌된 문장은 그러니까,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라는 문장의 변형같기도 하다. “그 집에서 살 때, 이 이야기에도 결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빠가 죽어야만 끝나는 그 이야기에서 저는 어떤 결말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아빠가 죽는다는 결말도 안 되고, 아빠가 죽지 않는다는 결말도 안 되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끝나버렸어요...” (p.78) 소설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그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이 사건을 방송에서 다룬 범죄 심리학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아빠의 죽음에 이르자 얼핏 독자인 내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기억되는 미래와도 같은...
김애란 「홈 파티」
“...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그에게서 먼저 그걸 빼앗으라’는 법칙이었다...” (p.123) 이 수상작품집의 작품들 뒤에는 작가의 노트가 붙어 있다. 작가는 그 노트에서 이 소설을 펼치면 술 생각이 난다고 하였다. 나 또한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등장 인물들에게서 비릿한 냄새가 났고, 알게 모르게 비위가 상했다. 술이라도 마셔야 가라앉을까 싶었다. 아마 작가와는 조금 다른 결에서 떠오른 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아이의 친구의 엄마인 K는 혼자서 아이를 키웠고 이런저런 글을 쓰며 돈을 벌었고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취미 삼아 캘리그라피를 하는 중이었는데 K는 자신의 작업실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나는 종종 그 작업실에 들렀다. 하지만 K의 아이가 아버지에게로 떠난 이후 K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음을 맞았다. 그럼에도 나는 K의 작업실에 들르고, 예전보다 더욱 자주 들르고, K의 작업실에 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일탈이다.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젊은 작가들의 소설 중 이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것들이 종종 눈에 띈다. 개중에는 아예 등장인물들 또한 외국인인 경우도 있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그렇지는 않다. 맨해튼의 다리를 배경으로 삼지만 그것이 우리의 성수대교와 자극적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있는 듯 없는 듯 불분명하게 존재하는 메시지의 소설을 독자인 내가 좋아하고 있다.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 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 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p.236) 평생교육원의 수필 쓰기 수업을 들으며 조용히 늙어 가던 그녀에게 불쑥 앵무새 한 마리가 찾아든다. 딸을 대신해 자신을 방문하는 사위가 잠시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자식의 부탁이라 억지로 떠안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감은 늘어갔다. 그리고 앵무새가 떠난 후, 그녀는 드디어 도무지 쓰지 못하던 수필 수업의 숙제를 해나가기 시작한다.
편혜영, 김연수, 김애란, 정한아, 문지혁, 백수린 /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 문학동네 / 253쪽 /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