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느림으로, 외롭기 그지없는 단편 소설...
「구멍」.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들에서 얻은 숫자들로 번호를 만든 다음, 매주 토요일이면 꾸준히 로또를 샀다. 그렇게 힘들고 지치게 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나는 해외 여행 티켓을 드린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여행을 떠나느라 사지 못한 그 주의 로또에, 그렇게 평생 잊지 않고 적어 넣던 바로 그 숫자가 로또에 당첨된다면... 그 옛날 외할머니가 들어갔던 우물처럼, 운명처럼 인생에 뚫려 있는 구멍, 그리고 그 구멍 주변에 포진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하다 만 말」.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한 아버지의 마지막 실패 후 이 가족은 여행을 떠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통장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바로 그 통장을 들고 떠나는 여행...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들인 오빠로 이어지는 이 부계 혈족의 끝을 모르는 나태와 오만과 여유를 뒷받침한 엄마, 그리고 죽은 딸의 커다란 한숨 같은 이야기... 그 한숨 뒤에 따라 붙을, 그녀가 하다 만 말은 무엇일까...
「등 뒤에」.
“... 수건 끄트머리가 사타구니에 닿을 때마다 웃음이 났다. 어릴 적에는 감지럼 따위는 전혀 타지 않았다... 사랑에 실패하고 난 뒤에 간지럼을 타게 되었어요...”아들을 잃은 그, 그리고 죽은 아들을 둔 반쯤 정신이 나간 아줌마를 구한 적이 있는 나... 교통사고를 당한 나와 나를 구해준 그... 강풀의 공포 만화를 보는 것처럼 토막토막 이미지들로 이어지는 소설...
「감기」.
선풍기 날개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톨게이트에서 일을 하는 그녀와 마을버스를 모는 남자... 잘못 보낸 문자 메시지를 통해 그들의 소통은 시작된다. 엉뚱한 장소에서 만나고 엉뚱한 말을 주고 받고 자신들이 만난 엉뚱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재채기」.
매년 돌아오는 고백의 날... 그 고백의 날의 기원을 찾아 길을 나선 다섯 남녀의 이야기... 감기에 걸리고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도미노 게임을 망치고 이로 인해 자살을 해버린 여자 아이, 그리고 그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머지 자신의 재채기를 고백하기 위해 달력을 만들고 자신의 사연이 라디오에 소개되는 바람에 시작된 고백의 날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뭐 고백할 것으로 채워진 우리들 일생에 고백의 날이라는 것이 있다면, 하는 설정...
「리모컨」.
지하철 타는 것을 좋아하고 그 지하철에서 무엇인가를 주워오기를 좋아했던, 세 번째 남자친구 덕분에 ‘서랍정리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여자의 이야기... 무수히 많은 직업들과 그 직업들을 가지게 된 다양한 이력들로 충만한 세상사는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좀더 흥미진진하게 소설을 써준다면 좋으련만...
「저 너머」.
사랑을 좇아 원래의 부부관계를 끊고 결합한 엄마와 아빠는 세상의 모든 연들을 끊은 대신 공원에서 풍선을 팔았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며 일을 하는 그들이 어느 날 나에게 썬라이즈 썬쎗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까페 하나를 지도와 함께 넘겨준다...
「이어달리기」.
작품집의 많은 소설들 중 가장 재미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잔치국수를 파는 13호 할미에게서 부적처럼 도마를 넘겨 받는다. 그리고 우여곡절 많은 그녀의 세 딸들이 교통사고를 당한 버스의 승객들을 구하는 바람에 티비에 출연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그녀가 말해주는 우울증을 줄이기 위한 이어달리기의 상상...
「안녕! 물고기자리」.
S와 Y와 E와 H의 한바탕 소란스러운 일상... 술을 마시고 먹을 것을 시켜먹고 놀이공원에 가고 동물원에 가면서 보내는 이들의 하루... 한없이 외로운 그녀들이 함께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상상과도 같은...
「무릎」.
12인승 승합차에 몸을 싣고 떠난 가족 여행... 서로에게 문외한인듯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가족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각자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 것이 가족일지도 모른다.
「부분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살아난 세 사람...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뱉어내며 길고 긴 시간을 견뎌낸다. 하지만 그 길고 긴 터널같은 시간을 보내고 구조된 그들의 그 다음 생은 어떤 모양일까...
모든 소설이 그렇지는 않지만, 소설집의 많은 소설들에 가족이 등장한다. 그 관계가 헐겁기만 한 가족 혹은 너무 꽉 조여져 있어 불행한 가족들로 이루어진,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자유로의 어정쩡한 안개와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나 우리가 실제 경험하고 있거나 우리가 실제 경험하고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가족의 이야기... 작가는 애초에 난해한 이야기를 더욱 분해하고 퍼즐화시켜서 우리 앞에 내어놓고 있다. 사실 난감하다...
윤성희 / 감기 / 창비 / 273쪽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