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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외 《2007 제31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존재하는 것들 안에 존재하는 것들...

by 우주에부는바람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

‘독일 서부의 작은 마을 S’의 언니를 찾아간 서른일곱 살 이인희... 이인희를 비디오에서 발견하고 첫눈에 반하여 그녀를 독일까지 불러들인 마흔일곱살의 초등학교 교사 하인리히... 그리고 그 전의 이야기들, 당뇨를 앓던 엄마와 고궁에 들렀다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나타난 사 년 전에 헤어진 모경... 그리고 다시 그 이전의 이야기들, 연애경험이 전무한 스물아홉의 이인희가 모경을 어떻게 만났고 또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가... “사람의 일생이란, 어린이 놀이터와 마트와 집 정원과 묘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학교와 성당과 은행과 맥줏집과 작은 광장도 있다...” 전경린 특유의 문체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순서와 상관없이 삶의 맥락들을 건드린다. 책상 위의 자잘한 칼자국처럼 책상을 버리기 전에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하지만 조금씩 흐릿해지고 처음의 날카로움을 잃어가는, 그러다가 또 한번씩 문득문득 손끝으로 그 패인 자국을 넘보게 되는 칼자국과 같은 맥락들... 그리고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살지 못하는 고통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얽매여 사는 고통을 더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 독일에서 이인희는 자신의 생에 또 어떤 칼자국을 남기게 될 것인지...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 1」.

“... 빌어먹을, 물고기 내장같이 좁아터진 도시……... 교활한 혼음의 도시, 뻔뻔한 근친상간의 도시, 죽어서 떠오른 물고기 비늘같이 싫증나는 도시…….”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 그 존재의 흔적만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전경린 특유의 문체는 가끔 섬뜩하기까지 하다. 공들여만들어진 도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친 도공의 망치에 산산조각이 나버린 도자기의 파편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이어붙이며 자신을 향해 자해하는 도공과 같이 전경린은 자신의 소설은 부서지고 다시 조립되고, 다시 부서지고 다시 조립되는 희안한 반복을 통해 완성되는 것만 같다.


공선옥의 「빗속에서」.

“... 아내는 여전히 소파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가슴을 잃고 이제 더 이상은 자신이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그래서 정말로 날이 갈수록 아내 특유의 부드러움이 아닌 날 선 공격성을 드러내는 내 아내는...” 오토바이를 탄 채 사라져간 아이와 암으로 가슴을 일은 채 날 선 공격을 거듭하는 아내, 과일장사를 하다가 얼떨결에 협박 전화를 하고 이후 도망다니는 형, 옥수수 장사로 연명하고 있는 부모... 쏟아지는 빗속과도 같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있는 내게 나타난 옛 직장 후배였던 이혼녀 향이의 존재... 돌파하기 힘든 또는 돌파할 수 없는 삶의 한 국면에서 크게 숨 한번 쉬어낼 수 있는 바늘구멍이라도 찾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 남자의 이야기...


한창훈의 「아버지와 아들」.

섬마을 아버지와 아들의 어느 새벽 참돔 낚시기... 물때 좋은 어느 날 아비는 아들에게 함께 낚시를 청하지만, 그 전날 아들은 술에 만신창이가 되어 들어온다. 섬 바깥으로 아들을 내보내길 원하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제대를 하고 돌아온 아들은 섬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리라 다짐을 한다. 두 사람의 어긋난 손짓으로 시작되지만 소설은 그것을 깔끔한 조응으로 마무리한다.


김연수의 「내겐 휴가가 필요해」.

남쪽 바다에 면한 한 도서관에서 십여년 동안 매일매일 책을 읽었던 한 노인의 죽음... 그리고 밝혀지는 그 노인의 과거사 이야기... 이제는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린 엄혹하던 시기의 의문사, 그리고 그 의문사에 연결되어 있던 전직 정보과 형사인 이 노인은 왜 그토록 도서관의 책에 집착했던 것일까...


권여선의 「약콩이 끓는 동안」.

“... 세상 모든 인간이며 사물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가 어느 순간 천연덕스럽게 다시 그 자리에 출현해 자신의 맹점을 비웃는 통에 그는 종종 억울하고 약이 바짝 올랐다.” 작가의 인물들은 어딘지 나약해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상상 초월의 섬찟한 악마성을 발휘하는데 이 소설에서 그것이 가장 극명하다. 사고로 운신이 힘들어진 교수와 교수를 돕기 위해 파견된 대학원생 여자, 그리고 교수의 두 아들과 교수의 가장부인 아줌마...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이들 사이를 약콩 끓이는 소리와 냄새가 부유하고, 어느 순간 폭발한 이들 사이의 관계는 또 그렇게 폭발할 때만큼이나 빠르게 시들어간다. 그래서 생은 평화로운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천운영의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눈을 뜬다. 방 안 가득 들어찬 햇살에 눈이 부시다. 다시 눈을 감는다. 눈알이 씀벅씀벅한 것이 꼭 사포질이라도 하는 것 같다...” 일본 여행객들을 상대로 누드 사진을 찍고 있는 내가 그날 폭행을 당하며 부여잡은 것은 무엇일까... 그 표면의 요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신이 부여잡은 소재를 사포질하는 것만 같은 작가가 보여주는 텁텁한 이야기... 이제 그들은 예쁘게 포장된 몸이 아니라 삶의 신산한 굴곡이 담긴 포장된 몸의 내부에 있는 포장되어 있지 않은 알맹이를 찍을 수 있게 될까...


편혜영의 「첫 번째 기념일」.

택배 집하장을 운영하고 있는 나, 그리고 배달되지 않고 남은 물건들... 그로테스크한 작가의 특징들이 살짝 수그러든 것 같지만, 소설 전체에서 묻어나는 음습함은 여전하다. 도대체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천형처럼 발현되곤 하는 그 음습함은 이 젊은 작가의 어느 부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잠복하고 있는 것일까...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김애란의 작품은 짧은 단편임에도 수많은 복선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의 발랄한 문체가 아니라 소설 속에 무수하게 박혀 있는 문장과 단어와 단락들이 날렵하게 연결되는 모양을 볼 때 입이 딱 벌어진다. “껌의 찢어진 절단면이 파르르 흔들렸다...”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버려지는 순간에 대한 묘사와 거기에 이어지는 현실에서의 껌이 연결되며 이런 절묘한 문장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부디 오래오래 그리고 열심히 써주시라, 작가여...



전경린, 공선옥, 한창훈, 김연수, 권여선, 천운영, 편혜영, 김애란 / 2007 제31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 346쪽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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