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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석 《목숨의 기억》

자해하는 혀가 뱉어내는 삶의 비의...

by 우주에부는바람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금씩 스스로를 소진하다가 어느 순간 점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들은 바로 이곳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 그곳으로 옮아간다. 물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그곳에 대해서는 지금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되며, 말을 하는 순간 우리들의 혀는 자해로 얼룩지고 만다.


「그림자들이 사라지는 곳」.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 삶의 대부분이 사건처럼 벌어지는 이곳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에 치중할 뿐, 그곳에 대하여 함구해야 하는 법칙을 깨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격리는 사람에게는 가혹하다... 사람은 죽음을,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고, 원한다면 평생토록 생각해보고, 탐구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사람의 그런 생각과 욕망으로 인해 그 격리는 더욱 가혹하다...” 최인석은 이러한 우리들이 아는 한 가장 근원적인 이분법적 구도라고 할 수 있는 삶과 죽음, 그 양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아니 그 이분법적 구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산 것들은 이미 그곳에 죽은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닐까. 모든 산 것들은 언제나 틀림없이 죽으니까...”


「목숨의 기억」.

그런가하면... 작가는 쇄도하는 우리들 삶에의 역주가 끝나갈 즈음에 맞이하는 애환을 다루기도 한다. 사라지거나 떠난 부모를 대신하여 나를 키워던 할아버지가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이제는 꽃만 먹고 있으며, 엄마의 젖을 대신하여 내가 빨곤 하던 그 할머니의 젖을 대신 빨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들 삶은 제아무리 역주에 역주를 거듭하였다 해도 결국 회귀하는 연어처럼 날 이곳에 있게 하였던 그곳으로 돌아갈 따름인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산다는 일이 이미 그러하지 않을까. 제 뜻 아닌 계기로 시작은 하지만 끝은 없거나 알지 못하는 이야기 같은 것. 죽음이 물론 모든 사람의 삶을 끝장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저 물리적인 끝일 뿐, 사람이 각기 평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은 언제나 엉뚱한 자리에서 중단되고 마는 것 아닐까...”


「미미와 찌지-盆地에서 노래하는 앵벌이」.

그러하여도... 어쨌든 사는 동안에 우리가 겪는 우여곡절의 애환도 만만치는 않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신을 키우는 이모에게 조금 홀대를 받아도, 그리하여 선택한 아버지의 삶이 보여주는 곤궁함이 무지막지 하여도, 우리는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제 앞에 놓인 밥그릇에 적응해가며 살아갈 따름이다. “아비의 밥은 이모의 밥과 달랐다. 이모의 밥은 기름지고 풍족하고 부지런했으며, 언제나 지천으로 널려 있다 못해 먹다 남은 음식이나 때가 지난 음식은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아비의 밥은…… 뭐라고 해야 할까. 무섭다고 해야 할까, 가혹하다고 해야 할까. 가차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자비하다고 해야 할까...”


「달팽이가 있는 별」.

때때로...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과는 무관해 보이는 무엇인가에 홀리는 것을 원망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삶의 처연함 때문인 것이다. “원래 돌맹이들은 다 별이야. 다 하늘에서 떨어진 거야. 어떤 돌맹이들은 말을 해. 가만있으면 작은 소리로 말을 해. ‘돌려보내줘. 가고 싶어.’ 그런 돌맹이들만 간직하고 있다가 저녁 무렵에 하늘 높이 던지면 그게 하늘로 올라가서 별이 되는 거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듯 허공을 향해 돌을 집어던지는 바보 영득이의 행동에 홀리게 되는 것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한 일탈의 기억마저 가지지 못한다면, 존재하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어하는 것을 믿는 자유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말이다. “그렇다, 별이었다. 내 마음을 별이라고 하면 어떨까. 영득이의 조약돌처럼 작고 초라한 별, 집을 짊어지고 그 별 위를 혼자서 꾸물꾸물 기어가는 달팽이...”


「내 님의 당나귀」.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우리를 살아내는 동안 알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수구 위에 튀김집을 차리고, 이제 막 행복하여도 괜찮을 순간에 아내가 다치는 불행이 닥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장인이 등장하고, 그 장인이라는 사람이 상종하기가 곤란한 막가파식 인간이어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 삶의 어느 한켠에 은폐되어 있는 비밀의 자물쇠를 따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이 아비는, 아니, 순이 아비인지 아닌지 끝내 확인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은 순이를 화장한 바로 그날 종적을 감췄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이 궁금하지 않았다. 어쩌면 허공을 가는 당나귀를 찾으러 간 것인지도 모른다.”


최인석의 소설들은 약간 우리를 당황하게 하지만, 우리를 많이 서글프게 한다. 자해로 얼룩진 것 같은 그의 혀가 뱉어내는 소설들은 곤궁한 현실에 뿌리를 대고 있지만, 자꾸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향해 가지를 뻗으려 한다. 그렇게 썩어버린 채 허약한 뿌리로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길고 곧게 나아갈 것을 기대하는 우리들 삶은, 어리석기보다는 서글픈 것이다. 단언할 수 없지만 최인석의 혀는 그렇게 말한다, 자해라도 하는 것처럼...


최인석 / 목숨의 기억 / 문학동네 / 278쪽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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