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바벨>

신의 간섭이 사라진 시대에도 엄연한 혼돈의 여러 양태...

by 우주에부는바람

다들 아는 것처럼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을 상징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신으로부터 벌을 받아 서로 다른 언어를 (혹은 마음을) 갖고 살게 되었으며,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은 인간들 사이의 혼란을 야기하여 결국 바벨탑은 완성될 수 없었고, 이러한 벌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바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바벨은 고대 국가 바빌로니아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21세기 바다와 산과 사막과 호수와 인위의 벽과 철조망으로 구분된 나라들과 이러한 여러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혹은 그 나라 안에서도), 서로 다른 120여개의 언어(혹은 7000가지가 넘는)를 이용하여 소통하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확장된 바벨에 살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독의 영화를 더욱 심도깊게 만들고 있는 것은, 그가 단순히 서로 다른 언어의 문제만을 다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감독은 언어와 언어 사이를 다룰 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화의 사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사이, 문명화된 곳과 문명화되지 못한 곳의 사이를 비롯하여, 인간을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크레바스와도 같은 우리들 사이의 쩍 벌어진 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는 서로 다른 네 개의 이야기가 서로를 상관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진행된다. 모로코와 미국, 미국과 멕시코, 일본과 모로코라는 지리적인 공간, 양떼를 지키며 그 지루함으로 사냥총을 발사하는 모로코 소년 유세프와 아흐메드의 시간, 모로코를 여행하는 미국인 리처드 부부의 시간, 맡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유모 아멜리아의 시간, 어머니의 죽음과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견뎌내고 있는 치에코의 시간은 때로 중첩되고 때로 독립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영화는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하는 오해들로 범벅이 된다. 총에 맞은 수잔이 도착한 모로코의 마을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한 모로코 의사의 치료 행위에 수잔은 치를 떨고, 태어날 때부터 키워온 미국인 부부의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던 멕시코 유모는 결국 추방당하고, 유세프는 자신들을 체포하러온 경찰들로부터 아버지와 형을 구하려고 총을 쏘고, 그저 자신을 보듬어줄 이가 필요했던 치에코의 검은 음모는 모두들로부터 경원시 당한다.


태초에 인간의 언어가 하나였고, 바벨탑 같은 것은 짓지 않아서, 지금까지 인간의 언어가 하나로 유지되었다고 하여 인간들 사이의 오해가 없었을까. 신의 의지가 아니어도 인간의 의지로 빈번히 발생하는, 전세계의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 자신보다 못한 나라의 사람들을 향하여 보내는 경원의 시선으로 가득한 차별, 자신보다 떨어지는 기능을 가진 인간을 대할 때의 변변치 않은 태도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인간에 대한 신의 간섭을 은유하는 바벨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영화는 신의 간섭과는 무관하게 오해와 차별을 양산하고 있는 인간을 묵도하고 있을 따름이다.



바벨 (Babel)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랑쉐,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야쿠쇼 코지 외 출연 / 142분 / 2007 (2006)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신카이 마코토 감독 <초속 5센티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