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프리스트 《매혹》

허구와 실제를 아우르는 경계 소설의 매혹...

by 우주에부는바람

무턱대고 집어든 책인데 ,읽고 있는 동안 점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경계 소설(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류문학과 과학소설, 환상소설, 대체역사소설과 같은 장르소설이 결합된 형태를 말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경계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경계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탈주류이며 동시에 탈장르적인 작품들을 통틀어 이렇게 지칭한다)이라 불리우는 혼성 장르물이 보여주는 혼란스러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6부로 나뉘어진 소설은 주인공인 리처드 그레이의 존재감 회복에 관한 내용이면서, 동시에 존재감 상실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것은 나이얼이라는 존재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이얼이 주인공인 리처드 그레이와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드는, 두 사람이 모두 사랑하는 여인 수잔이 등장한다.


1부는 이것이 ‘여러 목소리로 술회된 나의 이야기’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러니까 등장하는 여러 가지의 목소리는 혹시 하나의 목소리의 변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린다. 하지만 소설이 끄트머리에 다 가도로고 우리는 이러한 암시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 힘들다. 우리는 그저 소설의 주인공인 인물이 1부에 나오는 소년처럼 어떤 트라우마를 가진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뿐이다.


2부에서부터 주인공 리처드 그레이가 등장한다. 그는 테러로 인해 상처를 입고 지금은 위기를 넘기고 난 후 요양원에서 회복 중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인 그는 단발성인 기억상실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리처드 그레이의 앞에 끊겨진 그의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여인 수잔이 나타난다.


“... 뚜렷하게 이유를 댈 수는 없었지만 자동차 폭탄 사건으로 이어지는 몇 주 동안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를 가진 시기였다. 아마 수와 연애를 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것을 기억해 내는 것은 중요했다. 그 조용한 인생의 공백은 여전히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시간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3부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 리처드 그레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리처드 그레이의 이야기이다.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는 리처드 앞에 수잔이 나타난 것, 그리고 수잔을 수라고 사랑스럽게 부르며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나이얼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며 두 사람은 위기를 겪는다. 그럼에도 리처드 그레이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다. 그는 좀처럼 나이얼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얼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수를 통해서, 그녀의 설명과 행동을 통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4부가 시작되면 소설은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리처드는 요양을 마치고 수와 함께 런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사라진 기억, 그러니까 수와 함께 했던 사랑의 시간이 복원된다.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들, 리처드 자신과 수, 그리고 나이얼에게는 일반인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글래머(매력 혹은 보이지 않는 구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부가 시작되면 이제 리처드 그레이와 수잔의 만남은 수잔의 시선에 의해서 재현된다. 나이얼과 함께 하던 어떤 저녁 리처드 그레이를 발견한 수잔이 어떻게 그에게 접근했는지, 두 사람의 영국으로의 여행에서 어떤 참혹한 일들이 있었는지, 더불어 수잔의 일대기 또한 서술된다. 그리고 드디어 불가시인(그러니까 우리들 일반인의 가시권 밖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왜 소설 속의 리처드 그레이와 수잔, 그리고 나이얼은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우리는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불가시인들은 두 가지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내가 만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우울증 환자였다... 두 번째의 공통된 요소는 구름이었다... 불가시인은 모두 고유한 오라, 일정한 밀도를 가지는 존재감을 두르고 있고, 다른 불가시인들은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6부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혼란을 겪게 된다. 우리들 독자의 일반적인 논리를 무시하는 것을 즐기는 듯한 이 작가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주었던 모든 것을 모조리 무시하는 듯한 면모를 과시한다. 이처럼 배배꼬인 작가는 소설 속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실제라고 느끼는 것들을 역전시킨다. 어쩔 수 없이 창조된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일부러 픽션이라는 미션을 부여하며 우리들 <리얼>한 세계의 사람들을 또다른 픽션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모두 픽션이야……. 너, 수잔, 그리고 그보다는 덜 하긴 하지만 나 자신도. 너는 내가 나를 대변하기 위해 이용한 또 하나의 표현이었다는 특수한 맥락에서 픽션이었어. 나는 너를 창조했어, 그레이... 네가 너를 <리얼>하다고 할 때는 내가 만들어 낸 너의 리얼함이 나를 기쁘게 하는 한도에서만 <리얼>하다는 뜻이고, 네가 수잔을 만난 그날 이래 너는 내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했어... 자기 자신을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픽션으로 고쳐 쓰려는 욕구는 우리 모두의 내부에 깃들어 있어. 욕망이라는 이름의 글래머[魔力]을 두르고, 진정한 자기가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보이기를 희망하는 거지... 내가 한 일은 바로 이거야. 너는 네가 아니고, 단지 내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던 존재야...”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 김상훈 역 / 매혹 (The Glamour) / 열린책들 / 430쪽 / 2006 (1984)


ps. 저자인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프리스티지>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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