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있는 모던함의 진부하지 않은 전진...
「장국영이 죽었다고?」.
“장국영이 죽었을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피시방에서 이혼녀와 두 시간째 채팅 중이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만 견딜 수 있다면 피시방만큼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도 없다...” 장국영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아비정전과 관련한 나와 채팅 상대 이혼녀와의 낯선 우연... “확인해보니 이혼녀와 나는 13년 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영화를 봤다. 이혼녀의 기억에 따르면 그날 관객의 정확한 숫자는 47명이었다. 골든 타임인데도 관객이 너무 적어 일부러 숫자를 헤아려보았다는 것이었다. 뭐든 숫자를 헤아려보는 버릇이 있었다고 이혼녀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을 의심하는 나에게 이혼녀는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지구상의 인간들은 여섯 사람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라고’ 주장하며 노엄 촘스키의 말을 덧붙인다. “노엄 촘스키 왈, 과학이란 길 건너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 맞은편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취객과 다름없다. 하지만 취객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가로등 아래에 불빛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이혼녀와 아비정전을 보았던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나간 극장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장국영의 죽음과 관련한 쪽지를 돌리며 플래시 몹을 하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과 마주친다. 농담과 같은 소설, 하지만 ‘장국영이 죽었단다. 유감스럽게도 이건 농담이 아니다.’라며 소설을 끝맺는 작가...
「당신의 수상한 근황」.
6년 전, 아무래도 보험 사기라고 보여지는 사건 이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내, 그 사건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딸, 그리고 보험 관련 범죄를 다루는 조사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나... ‘난생처음 데이트 신청을 받은 사춘기 계집아이처럼 들뜬 크리스마스이브’ 무렵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비유도 수상하고 소설 속 나의 행보도 수상한 그 무렵... 이 세상의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지만 마치 우리들과 한 꺼풀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들도 같은 등장인물들... 그리고 십년 전의 애인이 등장인물인 보험 관련 사건을 매몰차게 조사하고 결론짓는 나는 사고를 당하고 그렇게 거꾸로 뒤집힌 차 속에서 여기저기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
“페르난도 서커스단과 상관없는 이 이야기는,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과는 더욱 관계없는 이 이야기는...” 으로 시작되고 계속되는 소설...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서른이 훌쩍 넘도록 혼자 살고 있는 나’의 이야기 혹은 그런 나에게 ‘굴러들어온 1995년식 붉은색 프라이드’의 이야기... 그렇게 굴러들어온 차를 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했던 도로 주행 연수와 그 과정에서 만난 특정 상표 아이스크림을 고집하던 노인의 이야기...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사랑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사랑이어서 연인과 헤어질 때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녀를 잃었다는 슬픔이 아니라 사랑을 잃었다는 슬픔이다... 그러니 내가 사랑(욕망)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욕망)이었다...” 여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결혼하고 다시 헤어지고... 낭만적 서사로서의 사랑과 그 적들... “롤랑 바르트는 말한다. 독창성의 진자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의 관계이다. 따라서 빛나는 사랑을 위해 당신이 쟁취해야 하는 것은 그, 혹은 그녀가 아니라 그, 혹은 그녀와의 독창적인 관계이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
“... 단 한 번만이라도 나비를 태워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나비라는 물건이 얼마나 순식간에 타오르는지. 타올라서 불꽃이 날개인지 날개가 불꽃인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슬한 것인지. 나비가 타오를 때 나비는 전 생의 기억을 휘발한다. 휘발해서 타오르는 것이 나비의 기억인지 기억 속의 나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때 세상의 모든 교훈은 전락한다...” 광고회사를 다니다 어영부영 잘리고 집에 칩거한 채 브라운관 속의 케이블 티비 채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나... 그런 내가 다니던 광고 회사의 한 여자... 그녀를 위한 알리바이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에 대한 알리바이일까... ‘한 마리의 나비를 나는 기억한다’, ‘텔레비전은 바람둥이 연인과 같다’, ‘꼬박 한 달을 뭉개고 있던 그 침대가 문득 두려워졌다’, ‘어떤 나비는 비를 피해 서점으로 날아간다’, ‘그녀와 함께 산부인과에 갔다’라는 다섯 문장과 그에 딸린 다섯 단락으로 이루어진 소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어디서 본 듯한 제목인데(그것이 소설인지 영화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연극의 제목이다)... 그녀가 소설을 써서 등단을 하고 다시 소설집을 내고 유명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소설 속에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 현재와 가까운 미래의 내가 실려 있을 줄이야...
「타인의 취향」.
광화문 고구려 유물전을 계기가 되어 결혼한 마누라, 작가 지망생인 J, 그리고 여자친구인 H... 사라진 마누라와 함께 술을 마시지만 몸은 주지 않는 J와 결혼에 대해 변덕스러운 H...
「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
“... 집요한 것은 상념뿐이 아니었다. 간밤에 나팔 소리를 들었다.” 데이 트레이딩에 나섰다가 돈을 날리고 서울에서 밀려나 가까스로 둥지를 틀게 된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에서 듣게 되는 나팔 소리와 과거 어린 시절 자신의 동네 한 켠에 자리잡고 있던 장미정원의 실체... 이제 나팔 소리가 들리던 그곳에서는 유골이 발견되고, 어린 시절 자신이 발견한 장미정원에는 창백한 전학생의 장애인인 동생이 살고 있었다는...
「나가사키여 안녕」.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한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의 사건을 근간으로 한 역사적 사실을 이용한 허구로서의 소설 만들기...
김경욱 / 장국영이 죽었다고? / 문학과지성사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