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도 잇신 감독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가을처럼 투명한 사랑의 전령...

by 우주에부는바람

아무리 평온한 일상이라도 그것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사실만으로도 격렬해진다. 물론 매일매일이 전쟁과도 같다, 라고 내가 날 진단한다면 큰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실상 이즈음의 나는 전쟁과 전쟁 사이, 그 사이의 휴전 기간에 있는 것처럼 어딘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 내게는 격렬한 일상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투명하고 감상적인 풍요로움이라는 중독이 필요하다, 게다가 지금은 가을이지 않은가.


타나베 세이코의 동명의 단편소설을(원작은 약 20페이지에 불과하고 줄거리도 조금 다르다. 결정적으로 단편소설은 해피엔딩이다, 물론 영화가 언해피엔딩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영화화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원제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한 편의 동화와도 같다.


뇌성마비(이거나 아니거나)로 두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조제(구미코이던가 이름이 있지만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을 좋아하여 거기 나오는 주인공 이름인 조제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아버린)는 나이든 할머니의 유모차를 타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새벽이나 밤에 산책을 다닌다.


대학생인 츠네오는 마작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발랄순진한 그 나이또래의 청년이다. 섹스 파트너가 한 명 있는 듯하지만 학교의 또다른 여자 선배가 걸어오는 작업에도 무방비 상태인 채로다. 럭비부였으나 몸을 다치는 바람에 그만 두게 되었지만 크게 상심하거나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삶에든 긍정적으로 대응하게끔 커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새벽까지 일을 하고 돌아가던 츠네오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언덕길 아래로 굴러버린 유모차 속의 조제를 만난다. 그리고 초대받은 아침식사. 홍콩할머니귀신같은(내 맘대로 그렇게 생각....^^) 조제의 할머니와 조제가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떨떠름하게 받지만,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표정이 환하게 바뀐다. 소박하지만 너무나 맛있는 식사들... 그리고 조제와 츠네오는 차차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고, 할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츠네오가 조제를 찾아간 날, 둘은 섹스를 하고, 그 날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다.


츠네오의 옛애인인 카나에가(퀸카에 가까운 여대생) 찾아와 자신의 애인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을 못참아 따귀를 때리는(두 대 때리고 한 대는 맞아준다. 사실 카나에도 착하다, 입체적이지 못할 뿐...) 약간의 불순물 같은 상황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실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집안의 제사에 함께 참석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바꿔 조제의 양아치 친구로부터 빌린 자동차를 빌려 타고 떠난 조제와 츠네오의 여행... 세상에서 가장 야한 짓(도대체 뭔지 궁금하지만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야한 짓을 마친 후의 두 사람을 보여줄 뿐이다)이 끝나고 불을 끄는 순간 황홀한 바닷속 풍경이 펼쳐질 때 잠들어가는 츠네오에게 조제가 혼잣말을 한다.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너랑 세상에서 제일 야한 짓을 하려고 헤엄쳐 나왔어. 이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언젠가 네가 사라지면, 나는 미아가 된 조개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래도 뭐 괜찮을 것 같아.”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한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시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시점 평상시처럼 아침 출근을 하는 츠네오에게 조제는 이별의 선물이라면서 사연이 있는 SM잡지를 건넨다. 그리고 츠네오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마지막은 의외로 깨끗했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아니, 사실은 한 가지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헤어지고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종류의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다르다. 내가 조제를 만날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이별 후의 츠네오와 조제... 조제는 예전처럼 불편한 다리로 생선 요리를 하고 있다. 츠네오는 카나에와 만나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오열한다. 갑자가 터뜨린 츠네오의 울음에 호되게 가슴이 아프다. 뭉툭하고 느릿한 말투에, 까만 눈 속에 내부에서 발생시킨 에너지가 충만한 조제... 의외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 솔직한 그녀 조제... 마치 내가 그런 조제에게서 도망친 것처럼 가슴이 아파왔던 것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ジョゼと虎と魚たち) / 이누도 잇신 감독 /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 117분 / 20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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