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과 위악대신 선과 악의 본질 탐구에로...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난다. 어떤 경우 그것은 꽤 분명한 원인을 가진 채 나타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그것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막연한 불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삶이란 어떤 결과에 따르는 원인 또는 어떤 원인에 따르는 결과라는 도식 안에서 진행된다. 소설은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제공, 그 기저를 장악하고 있는 선과 악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협소하고 폐쇄적인 작은 마을 베스코스가 소설의 무대로 한정되어 있고, 극단적인 경우를 당하여 신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 있는 남자 주인공(이방인), 그리고 그 이방인으로부터 받은 제안으로 인해 선과 악의 문제에 골똘하게 되는 여자 주인공(미스 프랭), 이방인의 출현과 그의 뒤에 버티고 서있는 악마의 존재를 깨닫는 늙은 베르타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작은 마을 베스코스에 때아닌 이방인이 찾아온다. 이방인이 거처로 정한 호텔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는 미스 프랭은 우연(이기도 하지만 작은 마을을 벗어나고 싶다는 끊임없는 욕망으로 낯선 남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기도 한)히 산길에서 이방인을 만나고 이 자리에서 이방인은 미스 프랭에게 악마의 제안을 한다. 갑작스레 자신에게 닥친 이 제안에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힌 미스 프랭.
“왜 그러 짓을 하시죠? 그리고 하필이면 왜 우리 마을이죠?”
“중요한 건 당신이나 당신 마을이 아니오. 난 오로지 나만 생각하오. 한 인간의 역사는 전 인류의 역사니까. 난 우리가 선한지 악한지 알고 싶소...”
사실 이방인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과거사가 있다. 꽤 잘나가는 사업체의 사장이었던 이방인은 어느 날 괴한들에게 자신의 아내와 두 달이 납치되고, 구출 과정에서 결국 이들을 모두 잃고 만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인해 테러리스트에게 죽은 아내와 두 딸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이곳저곳을 떠돌던 이방인에게 어느날 악마가 찾아들었다.
“...그는 악마가 잠시 멀어졌다가도 이내 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평상시의 느낌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감지했었다... 악마가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악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다... 가능한 모든 형상을 악마에게 부여해보려 애썼다. 결국 그가 선택한 악마의 형상은 검은 바지와 푸른 셔츠를 입고, 검은 머릿결에 잘 어울리는 녹색 베레모를 쓴 스무 살 남짓한 처녀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이방인은 악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악마와의 대화에서 어떠한 해답도 찾지 못한 이방인은 결국 베스코스라는 마을을 선택하여 보다 치밀한 시험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악마를 받아들인)이 옳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악마와 대화하면서, 그는 악의 기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악마는 어떤 질문에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알아내려고 아무리 애써도 상관없어요. 굳이 답변을 원한다면, 신이 심심풀이로 우주를 창조한 자신을 벌하기 위해 찾아낸 방법이 바로 나라고 해두죠.’”
결국 소설은 모든 이들의 내부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으며, 어떠한 순간에 어떠한 결과가 일어나는 가는 선과 악이 가진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과 마주치는 접점의 형태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물론 선의 승리가 전제로 깔려 있다.(순진하지만 언제나 옳은 결론)
“선과 악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선과 악이 각 인간 존재의 길과 마주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을 뿐이다.”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선과 악의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한때 종교를 믿었던(아니 믿었다고 말하기는 어줍잖고, 그곳에 다니면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이런저런 기회들을 믿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이런 문제에 골똘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면 이런 가설도 가능하다. 지금 우리들 사이에 선과 악의 논의는 불필요하다. 인간 이성의 발달은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도 우리들 문제들 대부분을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관심은 선과 악을 넘어선 위선과 위악으로 바뀌었다. 선과 악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자신감은 거짓선과 거짓악이라는 보다 복잡한 문제에로 관심을 옮겨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대선과 절대악이라는 말장난같은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에구,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책은 꽤나 재미있으니 걱정하지 않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 / 이상해 역 / 악마와 미스 프랭 / 문학동네 / 2003 (2000)
ps. 이 책은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악마와 미스 프랭』(2000)으로, 나는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1994)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1998) 로 이어지는 <그리고 일곱 번째 날……>3부작을 마친다. 이 세 권의 책은 사랑, 죽음, 그리고 부와 권력에 갑자기 직면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주일 동안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나는 늘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심원한 변화들은 잠깐 사이에 일어난다고 믿어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삶은 우리를 난관에 봉착시켜 우리의 용기와 변화와 의지를 시험한다. 그럴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하거나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달아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도전은 기다리지 않는다. 삶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일주일, 그 정도면 우리가 운명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