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트머리에서도 시작을 쥐고 흔드는 이별의 제스처...
아내와 나의 작은 거실, 그 중앙에는 리프트업 소파 테이블이 있다. 엊그제 아내를 피해 테이블 옆을 지나치다 새끼 발가락을 부딪혔다. 나는 깨금발로 콩콩거리며 비명을 질렀는데 아내도 덩달아 놀랐다. 아내는 내게 다가오며 너무 아프겠다, 말했고 나는 아내를 제지하고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아냐 괜찮아 괜찮아, 말했다. 사실은 이 짧은 과정에 기시감이 들었는데, 서너 달에 한 번 정도는 발생하는 충돌이 아니었나 싶다.
“... 애나의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러니까 애나의 정신이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통해 노래하는 소리에 잠을 깨면 그 아름다운 아침 소나타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한 달을 살고 나니 그 소리가 너무 그리워 가끔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침묵하는 기계 뒤에 앉아 뭔가―뭐라도―쳐보았다, 그저 다시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pp.58~59)
소설 속 바움가트너는 십여 년 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내 애나를 잃었다.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소설 속 바움가트너의 일상에는 아직 애나가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바움가트너는 오랜 시간 불길에 휩싸인 뜨거운 냄비에 손을 데었다. 그 다음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만 굴러떨어졌다. 바움가트너는 칠십 세가 넘었고 아직 혼자 살고 있다.
“...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p.77)
사실 바움가트너는 애나 이후 처음으로 함께 살고 싶은 이가 생겼다. 그녀의 이름은 주디스이고 애나와도 서로 아는 사이였다. 바움가트너는 꿈에 애나를 만나고 애나로부터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디스에게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하지만 주디스는 바움가트너가 원하는 바에 미치지 않는 답변을 하였고, 시간이 흐른 다음 두 사람은 완전히 멀어졌다.
“... 바움가트너가 들은 바로는 아버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선택할 수 있었다.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 또 아버지의 선택이 반드시 그른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 때문에 남은 평생 비참한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하더라도... 옳은 선택이냐 그른 선택이냐는 없고, 둘 다 결국에는 그른 것이 되어 버릴 옳은 선택만 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55)
바움가트너는 애나가 떠나고 얼마 후 애나가 남긴 시를 모아 책을 출간하였다. 또한 애나가 남긴 글을 찾아내 읽기도 하는데, 독자인 우리도 덩달아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바움가트너는 애나의 발간된 글뿐만 아니라 애나가 남긴 다른 글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베브 코언이라는 학생을 동료로부터 소개받는다. 그리고 그 학생을 집으로 맞아들일 준비를 한다.
“... 문장을 만드는 데는 큰 노력이 요구되고, 큰 노력은 큰 집중을 요구하며, 문장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구축하려면 하나의 문장에 반드시 다음 문장이 따라와야만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큰 집중이 요구되는데, 이는 나에게 며칠이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는 뜻이다... 나는 늙었지만, 날들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나의 많은 부분이 아직 젊게 느껴진다. 따라서 손에 연필을 쥘 수 있고 눈앞의 문장을 볼 수만 있으면 여기 도착한 아침 이후 해온 일과를 똑같이 할 생각이다. 마침내 더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일어나 떠나면 그뿐이다...” (p.130)
소설 속 바움가트너는 마지막 장면에서 교통 사고를 당하는데, 바움가트너가 마지막으로 작업한 책의 제목은 《운전대의 신비》였다. 그리고 폴 오스터의 마지막 작품인 소설 《바움가트너》는 “...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 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章)이 시작된다.” 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 문장은 폴 오스터가 우리에게 남긴 재기 넘치는 마지막 제스처, 끝과 시작을 한꺼번에 쥐고 흔드는 모습으로 보인다.
폴 오스터 Paul Auster / 정영목 역 / 바움가트너 (Baumgartner) / 열린책들 / 250쪽 / 2025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