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범한 묘사 안에서 정곡을 찌르는 관계와 인물의 심층...
「남극
“... 어둑함 속에서 그녀의 입김이 보이고 머리를 덮는 냉기가 느껴졌다. 차갑고 느린 태양이 동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녀의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창유리 너머에 내리는 눈이었을까? 그녀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시계를, 자꾸 바뀌는 빨간 숫자를 보았다. 고양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사과 씨처럼 새까맸다. 그녀는 남극을,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지옥을, 그리고 영원을 생각했다” (pp.37~38) 국내에서 올해 발간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도 실려 있는 소설이다. 당시에는 여자의 선택과 남자의 행동에 주목하여 읽었는데, 이번에는 그저 문장에 현혹되며 읽었다. 묘사를 하는 동안 여기에서 거기로 넘어가는데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빨려든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인물로, 인물에서 자연으로 너무도 쉽게 옮겨 간다.
「키 큰 풀숲의 사랑」
“... 그는 예전에 키 큰 풀숲에 누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기대지도 않는다. 사고 현장에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람처럼,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뭔가 할 수 있었다는 듯이 거기 서 있다. 그들의 등뒤로 바다의 끝없는 소음이 겹쳐진다. 그들은 다 같이 바다의 소리를, 파도의 소리를 들으면서 남은 시간을 헤아린다. 무슨 말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세 사람 모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코딜리아, 의사, 의사의 아내, 세 사람 모두가 기다린다. 누군가가 떠나기를 기다린다.” (pp.62~63) 코딜리아와 의사의 관계를 의사의 아내가 알아차린다. 의사는 코딜리아에게 기다려 달라고 하였고, 십년 후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사의 아내과 와 있다. 서로 만나지 않고 인내하는 내연 관계,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참고 기다려 약속 장소에 나타나는 아내라니...
「물이 가장 깊은 곳」
“... 어젯밤에 그녀는 자다 일어나 욕실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달을 보았다. 달빛이 도금 수도꼭지를 타고 내려와 도기 세면대로 뛰어들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양치질을 하고 다시 침실로 건너갔다.” (p.68) 오페어(au pair. 언어와 풍습을 익히기 위해서 가정집에서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거들며 숙식을 제공받는 여자 유학생)인 그녀가 자신이 돌보는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켜낸다.
「진저 로저스 설교」
성장하는 여자 아이가 있고 남성성이 극에 달해 있는 남성이 있다. 춤은 일종의 미끼일 뿐이고, 소설은 남녀가 뒤집힌 성장기 같다.
「폭풍」
어머니를 학대하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는 지금 정신 병원에 있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의 눈을 닮아서 싫다고 하였고, 나는 어쨌든 계속 그곳을 찾는다.
「노래하는 계산원」
언니 코리는 나를 위해 섹스를 대가로 음식을 받는다. 나는 그 사이 심부름을 하기 위해 길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이제 나도 그러한 사실들을 모르지 않는다.
「화상」
“첫날 밤, 그들은 집 앞쪽에 나와 앉아 있다. 세 아이와 아버지, 그리고 새 아내 로빈. 아이들은 포치 그네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 경찰 제복처럼 무서운 파란색이다. 다리가 제일 긴 장남이 발로 난간을 밀어 그네를 움직이고, 남동생과 여동생은 양옆에 앉아 있다. 아버지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지만 의자를 흔들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을 떠올린다. 붕대와 연고 냄새, 알루미늄 포장에 싸인 거즈, 가벼운 화상을 치료하는 차가운 식초...” (pp.142~143) 과거의 상처를 피하여 시골의 집으로 옮겨 왔지만 상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집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밀려드는 벌레떼처럼 끈질기고 위협적인...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자메이카 여인숙》이 제목만으로 등장하여 반갑다. 나는 여성이고 너는 남성인데, 나는 너에게 ‘대프니’라는 이름을 권유하고 너는 그 이름이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이네.’라고 말한다.
「어디 한번 타봐」
“... 해가 나무 밝아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늘 위에서 대단한 난교가 벌어져서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못 보게 모두의 눈을 가리는 것만 같다...” (p.177) 소설집의 발간은 1999년이니까 작가가 이제 막 서른을 넘긴 다음이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구나, 라고 느끼게 되는 묘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심층, 그 정곡을 찌르는 대목들이 이미 적지 않다. “... 그녀는 남편과 10년을 함께 살면서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려 애썼다. 그렇게까지 꽁꽁 숨기는 것을 보면 굴껍데기 안의 진주처럼 정말 귀한 무언가가 그 안에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포기해버렸고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딱딱하고 텅 빈 껍데기뿐. 남편은 껍데기를 만드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 애초에 자기가 뭘 보호하려고 했는지 전부 잊었다...” (p.183)
「남자와 여자」
아빠와 오빠가 있고 엄마와 내가 있다. 일종의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그 역할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자매」
베티와 루이자, 베티는 아버지와 함께 시골집을 지켰고 루이자는 결혼해 나가서 아이들까지 뒀다. 베티가 생각한 루이자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에 돌아온 루이자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겨울 향기」
법의 심판 대신 개인적인 처리를 선택한 핸슨, 그리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리어 사이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소설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함께 배에 타고 있는 부치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도 그 배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것은 내가 물에 사는 뱀을 그만큼이나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불타는 야자수」
할머니 집에 엄마와 함께 머물던 소년, 소년이 집으로 가자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지체하는 사이 집으로 돌진한 화물차에 의해 소년의 엄마가 죽었다. 그리고 이제 딸을 잃은 소년의 할머니는 모든 것을 태운다. 야자수가 그려진 벽지까지...
「여권 수프」
딸을 잃고 파탄 지경에 이른 프랭크와 그의 아내... 프링크와 말도 제대로 섞지 않던 아내는 그날 특선 요리라며 수프를 내온다. 거기에는 ‘실종된 딸의 여권용 크기의 사진 아홉 장’이 들어 있다. 여권 수프이다. 아내는 프랭크를 용서하지 않는다.
클레이 키건 Claire Keegan / 허진 역 / 남극 (Antarctica) / 다산북스 / 343쪽 / 2025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