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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9시간전

오가와 요코 《은밀한 결정》

총체적으로 이뤄지는 소멸의 한 복판에서 결국 사라지다...

  “새의 소멸도 다른 경우처럼,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 공기의 느낌이 미묘하게 까슬했다. 소멸의 신호다. 나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주의깊게 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 카디건을 걸치고 정원으로 나가보았다. 그때 작은 갈색 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새, 관측소에서 아버지랑 같이 본 적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새라는 말의 의미도, 새에 대한 감정도, 새에 얽힌 기억도, 그 모든 것을.” (pp.13~14)


  소설은 어떤 섬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과 그 현상 속에서도 잘 멈춰지지 않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의 뒷면에서 ‘피 한 방울 없이 그려낸 고요한 디스토피아’라는 소설의 한 줄 요약을 발견하게 되는데, 책을 모두 읽고 나면 과연 그렇다, 라고 수긍하게 된다. 고립된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섬이라는 설정, 그리고 그 갇힌 곳에서 벌어지는 소멸은 그야말로 총체적이어서 무섭다. 


  “이제는 사진을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그립지도 않고, 가슴이 욱신거리지도 않아요. 그냥 반질반질한 종이 한 장일 뿐이에요. 마음에 구멍이 또하나 생긴 거죠. 그걸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은 아무도 몰라요. 소멸이란 그런 거예요... 마음에 새로 뚫린 구멍이 태우기를 원해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구멍인데, 이것만은 얼른 태우라고 아플 만큼 나를 몰아세워요. 모든 것이 재가 된 후에야 잠잠해지죠. 그때는 아마 사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떠올리지 못할 거예요...” (p.125)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잃었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지하 작업실에서 조각을 하였고 아버지는 들새 연구가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소멸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는 기억의 소유자였다. 많은 사람들은 섬에서 벌어지는 소멸이라는 현상에 따라 무언가를 잃는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그것들을 기억하고 또 원칙에 따라 그것들을 없애는 대신 보관하기도 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새의 소멸이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소멸을 순조롭고 완벽하게 적용하는 것, 불필요해진 기억을 신속히 없애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저의 업무입니다. 쓸모없는 기억을 언제까지고 끌어안고 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엄지발가락이 괴사하면 당장 잘라내야 합니다. 내버려두면 발을 통째로 잃게 되죠. 그것과 똑같아요. 문제는 기억과 마음에는 형태가 없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인간이 혼자만의 비밀을 숨겨놓을 수 있다는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는 셈이니 저희도 신중해야 합니다.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에요. 모습이 없는 비밀을 찾아내 분석하고, 선별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쪽도 비밀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뭐, 그런 거예요.” (p.139)


  섬에는 또한 비밀 경찰들이 있다. 비밀 경찰들을 소멸에 따라 기억의 층위에서 사물들을 없애지 않는 자들을 색출하는 일을 한다. 나의 엄마는 비밀 경찰들에게 잡혀 갔고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의 소설을 편집하는 R씨를 집에 숨기기로 한다. R씨는 비밀 경찰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이후 소환에 응하는 대신 나의 집으로 왔다. 나는 알고 지내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R씨의 공간을 집에 마련하였다.


  “기억 사냥으로 연행되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났다. 지금까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우리 세상에 섞여 있었지만, 왼다리가 소멸하자 더이상 속여넘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여태 은신처에 숨지 않고도 비밀 경찰을 피해서 몰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해온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놀라웠다. 그들은 우리가 새롭게 적응한 미묘한 균형 감각을 도저히 흉내낼 수 없었다. 제딴은 아무리 잘 흉내내도 힘의 배분과 근육의 모양, 관절의 움직임이 어딘가 약간 달랐다. 비밀경찰은 한눈에 그 차이를 간파했다.” (p.339)


  소설에는 액자 형태의 또다른 소설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쓰는 소설인데, 그 소설의 주인공은 타자수와 타자를 가르친 선생 사이의 관계를 그려나가고 있다. 액자 소설의 분량은 조금씩 늘어나는데, 이러다 액자 소설이 액자 바깥의 소설을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닌가 긴장하였는데,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독지인 나는 오히려 그런 소설을 잠시 꿈꾸었다. 액자 소설이 결국 액자 밖의 소설과 자리를 바꾸게 되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왼손, 눈물이 고이는 눈, 눈물이 타고 흐르는 뺨이 차례로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목소리였다. 사람들은 윤곽을 지닌 존재를 모조리 잃었다. 목소리만 정처 없이 떠다녔다.” (pp.364~365) 


  소설이 출간된 것은 1994년이다. 이미 기후 위기는 시작되었고 멸종 위기 생물종이 언급되던 시기였다. 2021년이 되었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소설에서 소멸되는 것은 향수, 리본, 모자 같은물건이기도 하고 새, 장미 같은 동식물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소설이 사라지고 종국에는 신체의 일부가 소멸하는 지경에 이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목소리였는데, 결국은 그 목소리마저 사라지고 만다.



오가와 요코 / 김은모 역 / 은밀한 결정 / 문학동네 / 367쪽 / 2021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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