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건조한 가운데에 심연의 유머가 있는 탐정의 탄생...

by 우주에부는바람

”가을도 저물어가는 어느 날, 오전 10시쯤이었다. 모르타르를 칠한 3층짜리 잡거빌딩 뒤편 주차장에는 매년 그렇듯 주위에 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낙엽이 잔뜩 깔려 있었다. 아직 굴러간다는 이유만으로 타고 다니는 블루버드를 후진으로 주차하고 건물 정면으로 돌아 나왔다. 잠금장치 없는 우편함 안에 든 것들을 꺼내 한 사람밖에 지나다니지 못하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2층 복도 안쪽에 있는 내 사무실로 향했다. 빌딩이라고는 하지만 도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마라톤 비공인 세계신기록 못지않은 속도로 지어진 건물이다.“ (p.11)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은 작가 하라 료의 사와자키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위는 책의 첫 문단이자 그 시리즈의 첫 문단이어서 옮겨 보았다. 하라 료는 하드보일드 탐정물, 특히나 레이몬드 챈들러 식 탐정물의 계보를 일본에서 잇는다고 평가 받는 작가이다. 소설이 끝나고 마무리를 대신한 코너에는 ‘남자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다.’라는 필립 말로의 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건조한 가운데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위의 문단에는 그러한 하라 료의 혹은 사와자키의 태도가 묻어 있다.


“오른손을 보여주지 않는 남자, 가이후 씨, 사에키 씨의 협력자, 저격자로 보이는 남자, 올림픽 사격 후보, 재즈 피아니스트, 불치병을 앓는 사내, 그리고 기억을 잃은 사람······. 다들 실명이 드러나지 않아 진절머리가 났다.” (pp.261~162)


지금까지 읽은 사와자키 시리즈는 그 의뢰의 순간에서부터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의뢰인이 얌전히 탐정을 만나 사건을 의뢰한다, 라는 일반적인 방법은 통용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그에게 사건을 의뢰한 최초의 순간에 존재하였던 가이후 씨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미지의 인물로만 등장한다. 사와자키는 사건을 풀어내면서 동시에 그 의뢰인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고야 소이치로가 그때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내용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그때 그걸 묻고 그가 대답을 했더라면 두 명의 사망자와 한 명의 중상자를 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p.320)


소설은 가이후라는 미지의 인물이 탐정 사무소를 방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이 인물이 실제 이름으로 총탄을 발사한 뉴스로 마무리 된다. 그 사이 무수한 인물과 다양한 사건이 촘촘하게 배치된다. 사에키 나오키의 실종이 가장 표면에 깔려 있는 사건이고 시장 후보의 저격은 그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두 사건은 사라시나와 고야 집안 그리고 사키사카 집안이라는 재계와 정계의 인물들로 채워진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애정과 진실을 배려하는 것이 증오와 거짓을 배신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더 깊은 상처를 입힌다는 생각을 했다. 직업상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의 배반을 보는 건 일상다반사지만 괴로움 또한 서로 나누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모양이다...” (pp.396~397)


사건이 치밀하고 방대하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도 많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사와자키 탐정 자체도 이미 미스터리한 배후(와타나베라는 사라진 탐정 동료)를 지니고 있어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인물과 사건의 배후에는 색다를 것 없지만 언제나 의외이기도 한 인간 감정이 배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자칫 한눈을 팔면 엉뚱한 상념 안에서 스토리의 전개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 그 방은 설계자가 서재나 응접실은 서재나 응접실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건축 철학을 지닌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서재 겸 응접실이었다...“ (p.284)


별개이지만 위의 문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내 독서의 발목을 잡았다. ‘A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B다’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반어법을 통하여 강조를 하는 문장인데 몇 번을 되풀이하여 읽어도 정확하게 의미 전달이 되지 않았다. 저 문장 뒤로는 과장되고 기이한 형태의 책상과 응접 세트 묘사가 이어지는데... 소설을 모두 읽고 편집자가 업인 아내에게 문장을 읽혔는데, 그녀도 헷갈려 했다. 아 다행이다.


하라 료 / 권일영 역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そして夜は甦る) / 비채 / 447쪽 / 2008, 2018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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