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정말 정말 정말 마지막에 나타나는...
소설의 제목은 ‘내가 죽인 소녀’이지만 실제로 소설 속의 나 그러니까 탐정 사와자키가 소녀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사와자키는 의뢰인 줄 알고 찾아간 마카베 오사무의 집에서 엉뚱하게되 그집 어린 딸의 유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사와자키는 6억원이라는 거액의 몸값을 전달하는 임무를 띠고 투입되지만 결국 두 폭주족과의 시비 끝에 정신을 잃고 몸값도 잃어버린다.
”아쿠쓰 다카오는 자수가 아니라 체포당하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 반드시 상식 있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식 있는 행동을 하려고 명심하고, 노력하고, 결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의 시간은 약간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에겐 늘 시간이 부족하다.“ (p.197)
그렇다면 그 몸값의 전달 과정에서 훼방꾼 역할을 한 두 폭주족만 잡으면 곧 사건의 해결에 다다르리라 예상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흐른 다음 소녀는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젊은 폭주족은 잡히지만 그들에게 엉뚱한 일을 시킨 그 윗선까지는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 사이 사와자키는 소녀의 외삼촌인 가이 마사요시의 의뢰로 그 집안의 인물들을 차례로 만난다.
“재작년 가을 이후 처음 받은 와타나베 겐고의 소식이었다... 나시고리 경부의 선배인 전직 형사로, 8년 전에 ‘세이와카이’의 각성제 거래에 경찰의 미끼로 협력하기로 했지만 거래 현장에서 1억 엔의 현금과 각성제 3킬로그램을 강탈해 도망친 남자였다. 그 무렵 이미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그때 사건을 담당했던 니시고리나 와타나베를 찾아 이 사무실에 쳐들어온 세이와카이 간부 하시즈메와의 악연도 그때 맺어졌다. 와타나베는 사건이 있던 날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잊을만 하면 이 종이비행기 소식과 함께 나타나 종이비행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pp.257~258)
소설 속에서 범인은 옷깃 정도만 잡혀줄 뿐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처음에는 두 폭주족이 그리고 다음에는 가이 마사요시의 숨겨진 딸과 그 남편인 유키, 그리고 다시 유키의 친구인 기요세의 옷깃을 잡지만 결국 진범은 그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그렇게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여기에 오래전 사와자키를 곤경에 빠뜨린 와타나베의 종이비행기까지 종종 날아든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나 냅킨꽂이, 선반의 꽃병과 성냥 꽂이 등은 칠이 벗겨진 것 같은 양철로 만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 외국 자동차 번호판을 가공한 것이었다. 꽃병의 꽃은 모두 드라이 플라워, 조명은 모두 골동품 램프에 전구를 끼운 것, 테이블 유리판 아래 끼워 놓은 것은 모두 서양의 옛날 신문이었다. 내 테이블에는 존 F. 케내디의 대통령 당선을 알리는 〈워싱턴포스트〉지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BGM은 모두 ‘비틀즈’다―라고 계산대 옆에 있는 안내판에 적혀 있었으니 그럴 것이다.” (pp.244~245)
소설은 그렇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지만 굉장히 잘 읽히기도 한다. 이는 작가의 유려한 배경 묘사가 한몫한다. 탐정이라는 직업상 사와자키는 집이나 빌딩, 까페나 술집 등을 자주 방문하는데 그때마다 작가는 소설의 진행이나 등장인물의 필요에 따라 설정한 뉘앙스를 잊지 않고 그 배경 묘사에 덧입힌다. 이와 함께 여러 추격이나 방문 후 귀가길에 눈에 비치는 것들에 대한 묘사도 잊지 않는다.
“초여름의 하루는 돈을 꾸기 위해 늘어놓는 서론처럼 길어, 니시신주쿠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는데도 창밖은 아직 환했다...” (p.387)
그리고 그 묘사들이 긴박한 중에도 헛, 숨쉴 틈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위와 같이 느닷없는 비유의 문장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여튼 소설은 마지막 진범이 등장하는 순간까지 독자들을 도시의 여기저기로 계속하여 끌고 다닌다. 그리고 결국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에는 찜찜하지만 가슴 아픈 결말에 이르게 된다. ‘내가 죽인 소녀’의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마지막 순간에야 나타난다.
하라 료 / 권일영 역 / 내가 죽인 소녀 (私が殺した少女) / 비채 / 479쪽 / 2009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