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에 반하는 인간과 사건의 행적을 좇았던 죄의식...
소설은 한 남자가 집 앞의 호수로 나룻배를 타고 나간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도록 호숫가에서 30미터쯤 멀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물에 가라앉도록 밀어 넣는다. 다음에는 왼팔을 뱃전에 올려 놓고 칼로 손목을 긋는다. 오른팔 역시 순서에 따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다. 그 상태로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이름은 줄리언 웰즈이고, 50대의 지금까지 그는 잔혹한 범죄와 악한 인물에 대한 다섯 권의 책을 썼다.
“로레타가 말한 처녀작은 1911년 스페인에서 자행된 전설적인 잔혹 행위를 다룬 줄리언의 소설 《쿠엥카의 고문》을 뜻했다. 그 책 이후로 줄리언은 사실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작품이나 글을 구상하러 잠깐씩 들를 뿐이었다. 《쿠엥카의 고문》 이후로 그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외국으로 나가 집필을 하고, 잠깐 돌아오고, 다시 떠나 글을 쓰고, 잠깐 돌아오는 식이었다. 로레타와 공동으로 물려받은 몬턱의 농가를 떠났다가 해변으로 떠밀려온 시체처럼 불쑥, 미리 연락도 없이 나타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p.19)
그가 쓴 첫 번째 책은 《쿠엥카의 고문》이다. 두 명의 농부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실종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백을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농부들은 무고한 이들이었고, 실종자는 오랜 시간이 흐른 멀지 않은 곳에서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번째 책은 《오라두르의 눈》으로 나치에 의해 작은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그 도시의 많은 여성들이 금이나 은으로 만든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녔지만, 마리솔은 소박한 나무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줄리언은 처음부터 그녀가 허튼짓을 하지 않고, 한결같으며, 진지하고, 지극히 보수적이고, 굳건한 벽을 이루는 벽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중에 그는 과도한 혁명적 열정에 저항하고 급격한 변화의 바람을 늦추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내게 말했던 그녀의 첫인상을 그래도 빌어다 쓰기도 했다.” (p.91)
세 번째 책은 《공포》이고, 연쇄 살인범 질 드 레와 그를 도와 어린애들을 꾀었던 노파의 이야기이다. 네 번째 책은 《암호랑이》, 수백 명의 처녀를 살해해 그 피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가진 귀족 출신의 여성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잔혹 행위를 다루고 있다. 다섯 번째 책은 《코미사르》인데, 조심성이라고는 없었던 러시아의 연쇄 살인마 치카틸로가 나온다. 그리고 이 책들의 제목은 소설 속에서 각각의 챕터의 제목이다.
“... 지금 내게 꼭 필요한 건 행운이었다. 사실 줄리언의 책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알아낸 상태였다. 진실을 찾는 여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행운뿐이었다. 나는 줄리언의 책들은 물론이고 그가 남긴 메모와 편지까지 전부 읽고 또 읽었다. 그가 갔던 길을 따라 파리, 오라두르, 런던, 부다페스트, 짜흐띠제, 로스토프까지 갔다가 이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와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다 했는데도 나는 아직까지 내 친구의 밀실로 들어가는 문을 살짝 열어보지도 못했고, 그가 왜 호수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갔는지, 내가 거기 있었다면 그의 비극적인 선택을 막기 위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p.277)
소설은 모두 여섯 개의 챕터로 되어 있고,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사투르누스는 농경의 신이지만 자식에게 왕관을 빼앗긴다는 예언 때문에 자식을 죽이는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크라노스에 해당하는 로마의 신으로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간의 속성을 상징학도 한다.) 줄리언이 쓴 소설은 아니지만 어쩌면 줄리언이 쓰려고 하였으나 쓰지 못한 책의 제목일 수도 있다.
“줄리언 오빠가 자살을 한 건 오빠도 마리솔처럼 사투르누스의 기습의 피해자이기 때문이었어... 줄리언 오빠의 선량함이 오빠를 잡아먹은 거야... 바르가스가 마리솔의 순진함을 악용해 마리솔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처럼, 인생이 오빠의 선량함을 악용해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지... 온순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없어, 필립 오빠.” (p.322)
줄리언은 죽기 전날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라는 문장을 적은 바 있고, 로레타가 악에 대해 물었을 때 ‘선은 악의 가장 좋은 가면이다’라고 답변했다. 줄리언이 제 삶의 첫 번째 여행지인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마리솔이라는 가이드, 그리고 그녀의 실종 이후 평생에 걸쳐 마주하고자 하였던 사실과 그가 결국 떨쳐내지 못하였던 ‘줄리언 웰즈의 죄’가 곧 이 소설이다.
토마스 H. 쿡 Thomas H. Cook / 한정아 역 / 줄리언 웰즈의 죄 (The Crime of Julian Wells) / 알에이치코리아 / 327쪽 / 2014 (2012)
ps. 최근에 작가의 다른 소설 《브레이크하트힐》을 읽고, 그 소설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적은 바 있다. 이번 소설에서 줄리언의 책을 두고, 줄리언의 출판 대리인인 해리가 아래와 같이 난감해한 것과 비슷한 결이다.
“... 해리는 줄리언의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종종 불편을 했다. 범죄 소설로 분류해야 할까? 아니면 역사 소설로? 일반 논픽션으로? 그것도 아니면 실제 범죄를 다룬 기록 문학으로? 그의 책에는 역사와 과학, 철학, 방대한 양의 인용문이 골고루 버무려져 있어서 서적상들이 그의 책을 어느 한 분야의 서가에 꽂아놓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책이 ‘여행’ 코너에, 심지어 한번은 ‘뱀파이어’ 코너에 처량하게 놓여있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