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지 못한 사랑에 내재된 결핍이 삼십여 년 동안 쓰러뜨린 것들...
이 소설을 십대 소년의 사랑과 미움과 증오를 다루고 있는 성장의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한 소녀의 죽음이라는 결과에 연결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다루는 미스터리 혹은 추리 혹은 범죄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한 인간의 삼십여 년에 걸친 죄의식과 자책으로 가득한 삶을 다루는 심리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앨라배마 주 촉토 카운티, 브레이크하트힐에서 벌어졌던 흑인 노예들의 모임을 기리는 역사 소설로 볼 수도 있을까?
“... 나는 우정과 한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한테 느낄 법한 사랑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슬픔에 대해서도 조금 알았다. 아마 고독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한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고, 열정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 감정들은 켈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애는 햇빛이 가늘게 닿는 나무 벤치에 앉아 있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파란색 치마를 입고 두 다리를 끌어당겨 안은 자세였다. 구두를 벗은 맨발은 벤치 위에 무심하게 올렸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루크와 내가 지나갈 때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p.38)
《브레이크하트힐》는 이중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소설이며 동시에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읽든 실패하지 않는 몰입을 제공한다. 언제나처럼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하는 작가는 이번에도 현재와 삼십여 년 전을 별다른 저항 없이 오간다. 지금 중년의 의사로 존경을 받고 있는 나(벤 웨이드)와 고등학교 시절 한 눈에 반한 소녀 켈리 트로이와 마주하는 나를 오간다.
“... 100개의 독립적인 장면이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1000권의 책을 채울 법한 인생을 살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오는새벽보다 훨씬 큰 위협이 닥쳐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살았던 한때의 시간이 그리웠다. 그때 갑자기 켈 리가 보였다. 루크가 그날 브레이크하트힐까지 태워다주었을 때 얼핏 보았던, 고민에 싸여 괴로워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아울러 그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과 그 이후 따라온 모든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냐, 젊음은 필요 이상으로 큰 환영幻影이야.” (pp.93~94)
켈리는 볼티모어에서 내가 재학 중인 촉토 카운티의 학교로 전학 온 학생이다. 나는 학교 신문인 〈삵괭이〉의 1인 편집자인데, 어느 날 켈리가 신문에 자신의 시를 실어달라며 찾아온다. 그리고 이후 담당 교사의 추천으로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신문을 만든다. 신문을 만드는 작업이 끝나면 나는 켈리를 조금 떨어진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준다. 나는 너무 많은 상상으로 추억이 될 지경인 장면들 안에서 고백하고 현실에서 망설이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켈리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브레이크하트힐에 있고, 내 아래 있는 촉토의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켈리는 내 몸 아래 누워서 내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이 환영을 전부 보았다. 세부적인 모든 게 하나하나 너무도 실감나고 온전해서 환영이 아니라 추억에 더 가까워 보였다.” (p.227)
그런가하면 삼십여 년이 흐른 뒤의 나는 당시의 친구였던 루크와 여전히 그때를 가지고 대화한다. 루크는 아직 켈리를 살해한 라일의 살해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시 켈리와 가장 친하였던 나를 때때로 당시의 눈으로 쳐다본다. 마지막 시기의 켈리가 사랑하였던 토드는 완벽한 루저가 되었고, 살인자 라일은 얼마 전 자살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켈리의 모친인 미스 트로이가 나를 찾는다.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켈리에게 살인적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어야만 했다. 내가 켈리를 여전히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내 그리움이 폭력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켈리 트로이를 가질 수 없다면 그 앨 파괴하고 말겠다는 욕망이 얼마나 컸는지.” (p.329)
무르익지 못한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생래적인 결핍이 차례로 쓰러뜨린 것들이 소설 안에 있다.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것들은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아니 그 시간동안 끊임없이 쓰러뜨리기만 했을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반전의 사실은 충격적이어서 몇 번이나 같은 페이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혹시 내가 뭔가를 빠뜨리고 읽었거나 잘못 읽었나, 깊은 혼돈으로 한동안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저 읽어보시라고 말할 수 있을 뿐...
토마스 H. 쿡 Thomas H. Cook / 권경희 역 / 브레이크하트힐 (Breakheart Hill) / 오퍼스프레스 / 392쪽 / 2016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