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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1. 2024

이현호 《방밖에 없는 사람, 방 밖에 없는 사람》

자다 깨면 내 옆구리의 고양이 들녘의 옆구리를 쓰다듬는 주말...

  “오랜만에 커튼을 연다. 창밖 놀이터의 벚꽃이 어느새 죄 떨어졌다. 몇 송이 남지 않은 벚꽃도 오늘밤을 버티지 못할 듯싶다. 나는 커튼을 닫고, 바닥에 눕는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와 거미줄 위에 숨죽이고 있는 거미의 자세가 비슷하다. 물방울을 닮았다. 우리는 그렇게 꼼짝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면 어딘가로 흘러가버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품속에서 소중한 무언가가 날아가버리기라도 할 듯이... 괜한 미안함과 죄책감마저 없다면, 나는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p.21)


  지난 주말 이틀을 꼬박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내의 발바닥에 문제가 생겼다. 토요일 정형외과에 다녀온 아내는 발바닥의 힘줄이 부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족저근막염과는 다른 것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병을 발견하게 된다. 점점 더 많은 병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그 병과 함께 할 것이고, 그만큼 방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귀신이라도 나와주었으면 싶을 만큼 외로운 날이었다. 그러나 정말 귀신이 나온다면 그것은 무섭다기보다는 무섭도록 쓸쓸할 일...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떠나 내가 있었던 곳을 찾는 마음은 나보다 얼마나 외로운 것일까.” (p.27)


  물로 그것과는 별개로 방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책을 낸 시인이 아마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방을 오브제 삼아 책 한 권을 뚝딱 써냈다. 방은 시인의 한 세상이면서, 세상으로부터 비껴나 있으며 한 발 턱 걸치고 있기도 한, 세상에 연연하지 않음을 모토로 삼는 전초기지 같은 곳이다. 방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방 이야기를 읽다가 코로나 이후 두문불출하는 선배 H가 떠오르기도 했다.


  “고양이의 몸놀림은 꼭 붓놀림 같다. 고양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 보면 마치 어떤 거대한 존재가 방이라는 도화지에 그들을 붓끝 삼아 무언가를 그리는 듯하다. 고양이가 살그머니 움직일 때 그 운필은 몹시 신중하고, 우다다 뛸 때는 일필휘지다. 방 한곳에 움츠리고 있는 고양이는 마침표 따위의 문장부호이거나 화룡점정이다.” (p.96)


  잠시 식사거리를 사러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더 만달로리언>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소파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고양이 들녘이 내 옆구리를 차지했다. 한 시간쯤 낮잠을 자면 깨고는 했는데, 깨어서 내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양이 들녘이의 옆구리를 쓰다듬다가 다시 잠들었다. 결국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꿈도 많이 꿨는데, 동생이 살인을 저질러서 골머리를 앓는 꿈이 압권이었다. 그때 동생은 제주도 여행 중이었다.


  『“뭐해? 어디야?”

“집이야. 그냥 혼자 빈집에 있어.”

“네가 있는데 왜 빈집이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내가 살고 있으니까 빈집은 아니네.”

“심심하면 우리집에 놀러 와.”

“그 집에 네 집이지 왜 우리집이야?”

“네가 놀러 와서 같이 있으면 우리집이지.”

“그러면 우리집은 진짜 빈집이 되겠네.”』 (p.81)


  얼핏 보면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젊은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일상 투정기 같은 느낌인데 그 투정의 전시가 때때로 신선하다. ‘방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챕터와 ‘방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챕터로 나뉘어 있고, 각 챕터의 글자색이 다르다. 앞의 챕터는 파란색, 뒤의 챕터는 빨간색이다.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색이 조금씩 섞여 있다. 두 챕터에 실린 글들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집에 놀러온 친구가 책장을 구경하다가 말했다. “슬픈 책 좀 추천해 줘.” 나는 그 말이 문득 이상했다... 이미 슬펐던 마음만이 책을 읽고 슬퍼할 수 있다. 책은 슬픔을 모른다. 슬픈 책은 없다. 슬픈 것은 우리다. 친구가 찾는 것은 슬픈 책이 아니라 마음껏 슬퍼할 구실이겠지. 나는 친구를 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방에 친구를 혼자 두고, 방문을 닫았다. 자기의 슬픔보다 슬픈 책은 없다. 친구의 마음은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슬픔에 밑줄이 쳐져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 안의 슬픔을 읽어나갈 테다.』 (p.110)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올해 들어 처음으로 주말 이틀을 내리 집에서만 보냈다. 먹고 자고 읽고 보고 먹고 잤다, 라고 심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이틀이었다. 이틀 동안 게으름을 피웠더니 책을 세 권 읽었어, 라고 했더니 아내가 나는 두 권, 이라고 맞장구쳤다. 아, 책의 어느 페이지에선가 ‘윤슬’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란 뜻이다. 발음도 뜻도 모두 마음에 드는 단어이다.



이현호 / 방밖에 없는 사람, 방 밖에 없는 사람 / 시간의 흐름 / 159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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