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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1. 2024

김현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겨울이더니 겨울같더니 겨울답다, 라고 말하며 진정시켜보는 밤에...

*2021년 12월 2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일렁이다는 물에 떠서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것을 뜻하는 동사. 마음은 동사, 라고 어느 글에 쓴 적 있고, 덧붙이자면 일렁이다는 여름 동사의 일종. 겨울의 동사는 속삭이다. 봄의 동사는 어른거리다. 가을의 동사는 흘러가다. 어른거리고 일렁이고 흘러가 속삭이는 마음의 사계절. 동사를 활용해 마음의 사계절을 그려보세요...” (p.26)


  겨울이더니 겨울같더니 겨울답다, 라고 말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추위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보자는 심사다. 바깥 공기와 잠시 숨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안경에 잔뜩 김 서린다. 시동을 걸고 십여 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뒷좌석 어딘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작년 겨울에도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봄과 여름과 가을 동안 사라졌던 소리가 다시 등장했다. 이제야 겨울인 것이다.


  “나는 병든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아버지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정면과 아버지의 측면과 아버지의 뒷모습. 내가 지켜봐온 것보다 아버지가 더 행복한 인생을 혹은 더 불운한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 끝에는 늘 아버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p.68)


  겨울은 역시 밤에 제격인 계절이다. 낮의 겨울은 한물간 과거의 스타 같지만 밤의 겨울은 이제 막 쇼케이스에 등장한 아이돌 같다. 특히나 기상 캐스터가 하필 광장에서 서서 올겨울 가장 추운, 운운하며 오들오들 떠는 밤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내와 나와 아내의 어머니와 아내의 여동생과 아내의 어머니의 아들이 다함께 뉴스를 보았는데, 그다음 빙수를 주문하여 먹고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 최근 가장 큰 관심사는 언제 쓸까, 하는 것이고 가장 크게 관심이 사라진 것은 사람입니다. 그런 이유로 출근길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걸 시로 옮겨 적습니다. “숙자야, 너 오늘 계 탔다. 단풍놀이도 가고. 인생 뭐 있니, 놀다 가는 거지”라고 시작하는 메모 뒤에는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호의로 가득하다.’』 (pp.171~172)


  시인의 시는 읽지 못하였는데 시인의 산문집만 몇 권 읽게 되었다. 시인의 산문을 읽고 얼마간 시인의 시를 넘겨 짚어보기도 한다. 시인의 시가 가리키게 되는 방향에 서 있을 무언가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시인이 소환하는 삶의 구석구석의 빛과 어둠을 필터로 삼아 시인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억지로 합하여 시인의 시 한 편이 보여주는 총체를 따라가지 못할 터인데, 아직 시인의 시를 읽지 못하였다.


  “’영옥 언니‘라는 지칭을 시에 써야지 마음먹었다. 거기에 미풍양속을 담으면 좋겠다. 두부 파는 영옥 언니가 생애 처음으로 제주에 간다. 가기 전에. 영옥 언니는 만두소를 만들기 위해 흰 보에 두부를 넣어 물기를 꾸욱 짠다. 그때 영옥 언니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단 할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흥얼거리고. 한편,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카페 안을 어슬렁거렸다.” (pp.188~189)


  밤의 겨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얼른 두 마리 고양이의 사료를 챙긴다. 두 마리 고양이는 내가 건네는 츄르가 섞인 사료를 먹다가도 아내의 인기척이 다가오면 일단 자리를 벗어난다. 아내는 고양이 들풀이의 눈꼽을 떼어주고, 아내는 고양이 들녘이의 손톱을 깎아준다. 고양이 들풀이와 고양이 들녘이는 아내에게 붙잡히는 것을 싫어한다. 대신 아내가 잠들려고 할 때만 그 품으로 기어 들어간다.


  “강아솔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달리 부를 수 있는 말이 이렇게 많구나, 하고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봄. 정말 봄이구나.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회갈색 직박구리 한마리가 날개를 펴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생명의 몸짓에서 사랑을 보았다고 한다면 믿으실지. 손님이 한명도 없는 카페에 앉아 실로 오랜만에 말갛게 미소 지었다. 식은 사과차에 미지근한 물을 넣어 마셨는데도 제법 따스한 기운이 몸에 돌았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도 역시 사랑이고, 들키는지도 모르고 혼자 웃는 일도 사랑이다. 누군가를 기대고, 말없이 어깨를 낮추는 것은 각각 아름다운 일이지만, 역시 엇갈리지 않고 동시에 이루어질 때 더 사랑스럽다. 나란히 숨을 고르는 일. 사랑은 모쪼록 그런 일.” (p.227)


  적당량의 밥을 먹고 나면 고양이 들풀은 내 노트북 가방의 검정 뒷면을 방석 삼아 눕는다. 내가 리프팅 테이블에서 일하는 동안 그 옆에서 그러고 있기를 즐긴다. 고양이 들녘은 소파에서 잠들 때 내가 덮었다가 대충 팽개친 무릎 담요 위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들녘이를 피해 소파 가장자리에 앉는다. 그 옆으로 아내가 바닥에 앉아 전자책을 보다가 문득 들풀이에게 한 번, 들녘에게 한 번 눈길을 준다. 겨울밤이 깊다.



김현 /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 창비 / 234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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