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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7. 2024

파스칼 키냐르 《사랑 바다》

최대한의 감각을 곧바로 소모시키며 발 아래로 흐르는 음악을 향해...

  최대한 손바닥을 쫙 펴고 열 손가락이 촉수처럼 늘어나고 예민해지기를 바란다. 오래전 후배는 대마초의 기억을 이야기하며 셀 수도 없는 생각의 가지가 시간의 차이를 두지 않고 동시에 뻗어 나가던 경험을 묘사한 적이 있다. 그것이 만약 생각의 가지가 아니라 감각의 가지라면 어떨까, 오감이든 육감이든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감각을, 저장하지 않고 곧바로 소모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

  “처음엔 하튼이 그녀에게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튈린은 그저 자신을 자책했다. 얼마 후 그녀는 그의 음악에 깜짝 놀랐다. 튈린이 곧장 그 음악의 영향력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의 악보는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음악에서 감지한 각별한 슬픔에 애착을 느꼈다. 처음엔 그의 음악에 집착했고, 그렇게 그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연주했다...” (p.46)

  파스칼 키냐르의 책 세 권을 한꺼번에 샀다. 《사랑 바다》 그리고 《성적인 밤》과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소설을 에세이처럼 쓴다. 에세이는 물론 에세이처럼 쓴다. 파스칼 키냐르의 어떤 책은 이게 소설 장르에 놓여지는 것이 맞나 어리둥절하게도 된다. 에세이 소설, 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에세이화된 소설, 이라고 볼 수 있다. 간혹 배수아의 소설에서 그런 기미가 보였는데, 최근에는 읽지 않아서 어떻게 뻗어나갔는지 잘은 모르겠다. 확인해봐야겠다.

  “그녀는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이 낳는 고통에 오롯이 몰두했다.

  이 두 가지가 그녀의 열정이었다. 바다를 뺀다면 말이다. 그녀는 세상 끝의 군도에서 온 사람이었으니까.

  아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해 절대적인 두려움을 품기도 했다. 따라서 네 가지 색이 꾸려지게 된다. 사랑, 바다, 음악, 죽음...” (p.94)

  《사랑 바다》는 등장 인물의 등장과 퇴장 사이에 나름의 스토리가 놓여져 있다. 그러니까 읽을만한 서사 구조가 등장한다. 류트 연주자이자 악보 필경사인 하튼 그리고 노래하고 비올라를 켜는 튈린 사이의 사랑, 이라는 소설의 실마리(?)가 있다. 파스칼 키냐르의 다른 소설에서처럼 음악이 또 다른 주제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도 하다. 내가 파스칼 키냐르의 글을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복개천처럼 은밀히 흐르는 음악 때문이다.

  “애도를 위한 작업이 있듯 사랑을 위한 작업도 있다. 사랑은 열리는 문이 아니어서,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사랑의 초기에, 첫눈에 반한 사랑은 끊임없이 스스로 읊조리고, 스스로 상상하고, 스스로 재구성하고, 스스로 비교하며 재평가하고, 스스로 환대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환영해야 한다.” (pp.269~270)

  나는 그저 문장의 위를, 아래를, 옆을 흘러다니며 음악을 보고, 만지고, 흡입하려는 목적으로 파스칼 키냐르를 읽는다. 최근의 나는 무디어진 감각에 때때로 노출된다. 예전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나를 느끼는 내가 문득 싫어진다. 그럴 때 나는, 나의 아래에 흘러다니는 음악을 느끼지 못한다. 그곳에 음악이 있는 줄을 모르고 걸으면 내게 파스칼 키냐르는 아무런 재미가 없다.

  “사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몸을 포식하는 것 이상의 행위다. 더없이 동물적이고, 더없이 주의 깊고, 더없이 호기심 많고, 더없이 탐욕스럽고, 더없이 열렬하며, 더없이 매혹적인 포식을 넘어선 행위, 그것이 사랑이다.” (p.316) 

  몸 안의 감각과 몸 바깥의 감각, 경험하기 이전의 감각과 이미 경험된 감각의 복원, 내 발 아래의 음악과 내 발의 지금의 자취,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과 꾸준히 사라지는 인물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책을 읽었다. 편집과 디지인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다. 그간 파스칼 키냐르, 혹은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이번 책의 외피가 표출하고 있는 뉘앙스 사이의 불협화음이 거슬렸다.

파스칼 키냐르 Pascal Quignard / 백선희 역 / 사랑 바다 (L’amour la Mer) / 을유문화사 / 519쪽 / 20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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