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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박연준 《쓰는 기분》

시인이 크게 용기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를...

  읽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쓰는 기분’을 잊을 때는 아주 많았다. 나는 요즘 걷는 기분에 흠뻑 빠져서 ‘쓰는 기분’을 잊고 있다. 걷는 동안에는 많은 것들이 저절로 비워진다. 나는 그 비워짐이 좋다. 아주 좋다. 그 비워짐이 채워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걸음들만큼 뚜렷하여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비워짐과 채워짐 사이에는 시간의 여력이 존재한다. 내가 미처 몰랐던 어떤 힘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바꿔야 한다. 완전히 탁해지기 전에. 종이의 색을 파랑에서 초록으로 바꿔야 하는 사람처럼 마법을 부려야 한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 움직이는 장면의 합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오래 보면 책을 읽기 어렵다. 책은 움직이지 않는 장면(무대)에서 느리게 걸어다니는 언어를 좇아, 독자가 움직여야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움직이느냐, 네가 움직이느냐. 이 차이가 크다. 시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p.128)


  조바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뚫어져라 앉아 있는 이유다. 나는 입을 앙다물고 집을 나서고 길의 여정 곳곳에 무언가를 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나설 때와 돌아왔을 때의 낙차를 느낀다. 거기에서 어떤 에너지가 생겼다고 여기지만 그 실체를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잠시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잠자코 머물러 있는 것처럼 나는 걷고 있다.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고 한다.


  “쓸 때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내가 아니면서 온통 나인 것, 온통 나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나인 것.

쓸 때 나는 기분이 전부인 상태가 된다.

현실에서 만질 수 없는 ‘나’들을 모아 종이 위에 심어두는 기분.

심어둔 ‘나’는 공기와 흙, 당신의 눈길을 받고 자랄 것이다.

내가 나 아닌 곳에서 자라다니!” (p.8)


  책을 읽고 있자니, 시를 쓰는 사람의 ‘쓰는 기분’이 눈에 선하다. 쓰는 일, 특히나 시를 쓰는 일을 이리도 뚜렷하게 적어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잡으려 하면 빠져 나가고 보려 하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들으려 하면 굉음으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체의 한 귀퉁이만 보여주거나 작은 귀퉁이를 거대하게 확대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메타포는 시의 뼈대이자 피입니다. 인생에 드리운 커튼이기도 하지요. 고양이가 마음을 표현할 때 언제나 망토처럼 두르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세우는 집의 기둥과 서까래입니다. 이런! 저 역시 메타포가 무엇인지 메타포를 사용해 말하고 있네요. 이건 습관입니다.” (p.29)


  어쩌면 시인이 이처럼 크게 용기를 낼 수 있는 데에는 ‘메타포’가 한몫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에게는 ‘메타포’라는 무기가 있고, 심지어 그 무기를 습관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독자들은 시인이 무기를 휘두르는 모양을 보며 감탄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모양을 흉내 내기도 하는데, 그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타포’라는 무기를 제것인 양 사용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속엔 시가 들어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눈동자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멜론, 호박, 두부, 우유, 시금치, 뮤즐리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책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바람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나무엔 시가 있다. 어젯밤 전화해서 울던, 좋아하는 친구의 눈물엔 시가 있다. 책상 위 좋아하는 모래시계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커피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음악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무용수의 몸짓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도서관 창문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가을밤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죽은) 아버지의 굽은 등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좋아하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 그 속엔 하나도 빠짐없이 시가 들어있다.” (p.85)


  느닷없이 걷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읽는 것을 사랑하고 쓰는 것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 나는 요즘 낮에도 걷고 싶고 밤에도 걷고 싶다. 해가 있어도 구름이 있어도 걷고 싶고 비가 와도 걷고 싶다. 오늘 보다 내일 더 많이 걷고 싶은데 그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 될까 살짝 두렵기도 하다. 나는 조바심을 내면서 조바심을 감추고자 한다. 다음 길의 여정 곳곳에 떨구고 올 것이 떠올랐다.



박연준 / 쓰는 기분 / 현암사 / 263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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