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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최선(과 루틴)의 여왕인 아내와 함께 수십 년을 걷다 보면...

*2021년 9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아내는 내가 (잘) 아는 (정말) 최선을 다하여 사는 사람이다. 반면에 나는 그 정반대(라고 말하기는 뭣하고 대각선 방향으로 반대 정도)에 위치하는 사람이다. 아내는 내가 알기로 첫 번째 대학 등록금을 제외하고는 두 개의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한 번도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자신이 벌어서 납부하거나 장학금을 받았다. 반면에 나는 내 용돈 정도만 겨우 벌어서 충당했다. 봄에 집을 나와 여름에 집에 들어가곤 하였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한 달여가 지난 다음 직장을 그만뒀다. 두 사람 생활비로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두 사람이 모두 노동 현장이 나서나, 하는 내 말에 그럼 형이 직장을 그만둬, 라고 아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삼년 여를 신나게 놀았다. 오늘 나가면 내일이나 모레쯤 집에 들어오곤 했다. 아내는 생활비를 댔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 술값을 충당할 뿐이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번아웃되지 않고 최선 직전에서 어슬렁거리며 간 보기. 준최선으로 비벼 보기. 멀리 봤을 때, 최선보다 준최선이 가성비가 더 좋을지도 모른다. 최선은 관성을 깨는 행위이기 때문에 관성이나 습관이 될 수 없지만, 준최선은 관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준최선이 근육에 배면 어떤 일을 해도 디폴트 값으로 준최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선과 한 집에 살면 삶이 고달파지므로, 옆집이나 이웃 정도로 거리 유지를 하고 달걀 꿀 때만 최선이네 집에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충하는 것은 아닌데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묵묵하게 롱런하기. 준최선에서 한 계단만 오르면 최선이기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에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계단 내려와서 쉬고, 최선이 비켜난 자리에 친구나 여유, 딴생각과 재미, 그리고 소중한 것들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pp.34~35) 


  한 달 전쯤 아내의 팔목이 부러졌다. 여름 휴가를 맞아 홀로 자전거를 타고 녹번역 근처의 집에서 구리에 있는 장모님 댁으로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자신의 손목을 찍은 사진이 한 장 도착했다. 자전거에서 넘어졌는데 팔이 점점 부어오르고 있다고 했다. 구리 한강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저 멀리 미니스톱 옆 벤치에 앉아 있는 아내가 보였다.


  집 근처의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었고 팔목이 부러진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깁스를 했다. 부러진 뼈를 맞추었지만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다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을 피했고 4주가 지난 이번 주에 깁스를 조금 줄일 수 있었다. 대신 애초에 말했던 6주가 아니라 7주째까지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내가 깁스를 한 다음 날 달력에 D-41이라고 적었는데, 한 주가 늘어났고, 오늘 달력에는 D-16이라고 적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일상을 잘 살아 내는 사람이다. 예술을 위해 일상을 내팽개치는 예술가 대신, 밥도 잘 챙겨 먹고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자는 사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평범함’이다. 내게 예술이 전부였던 시절 나에겐 일상보다 시가 더 중요했다. 반면 시를 쓰지 않는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였다. 시를 잠시 떠나 있는 동안 내게는 무너진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걸음마를 하듯이 일상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무너진 일상을 복구하면서 쓴 일기들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 내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연습. 꿋꿋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촌스러운 게 아니라고, 하루를 잘 살아 낸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p.7~8)


  최선(과 루틴)의 여왕인 아내는 깁스를 한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나한테 이렇게 물었다. 근데 형 우리 이번 주말에 산에 갈 수 있어? 나는 한순간 멍해져 답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산에? 너 오늘 깁스 했어. 그러자 나만큼이나 당황한 것처럼 침묵하던 아내는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 그럼 형 달리기는 언제부터 할 수 있어?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달리기? 미친 거야? 한동안은 걷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그러나 아내는 그 후로도 몇 차례 둘레길 산행과 달리기에 대해 물어와 내 속을 뒤집었다. 


  나는 (일주일만에) 결국 손을 들어 항복하고 깁스를 한 아내와 걷기 시작했다. 지난 주 부터는 안산 자락길, 상암동의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을 걷고 있다. 토요일 안산 자락길을 걷던 아내는 너무 최선을 다하여 걱정인 직장 후배에 대해 조언을 구해왔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아내에게, 그건 네 후배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네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덧붙여주었는데, 아내는 아 그래? 라고 대수롭잖게 응수했다. 나는 이 책 《준최선의 롱런》을 아내(와 아내의 후배)에게 권하였다. 오늘 노을 공원에서 아내는, 다음 주에는 우리 다시 북한산 둘레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문보영 / 준최선의 롱런 / 부키 / 197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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