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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시가 된 것들과 시가 되지 못한 것들 모두를...

  책은 모두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시작 메모‘는 2011년 4월 13일에서 2018년 4월 15일까지 씌어진 글들이다. 이 글들은 ’글들‘이라는 폴더 안에 있던 작가의 글들이었고, 작가는 2018년 10월 3일 우리들 곁을 떠났다. 2부에는 시인이 2016년 출간된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이후 발표한 시들을 모아 놓았다. 3부는 작가가 자신의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 부친 작품론과 <시인이라는 고아>라는 제목의 시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은 동상이 나무 그늘 밑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내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쑥쑥 자라나고 있다. 여름 나무의 그늘이 커지는 것처럼 무언가가 커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언지 잘 모르겠다. 영악한 혀가 말을 하느라 우둔한 손이, 글을 쓰는 걸 잊어버렸을까? 어떤 형식이 뛰쳐나오지 못하고 내 속에 숨어 있다. 나와라, 나와라, 형식이여.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오래 꽁꽁 숨어 있는가?” (pp.46~47)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시작 메모‘이다. ’시작 메모‘는 시를 만들기 위한 메모이며 동시에 시가 시작되는 메모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아직 발아하기 전의 상태로 시인에게서 시작된 무언가가 담겨 있기도 하고, 그러한 발아에 책임을 지고 있는 시인이라는 직업 자체에 천착하는 심경이 드러나기도 한다. 발아가 시작될 것에 대비하고 준비해야 하는 시인의 고민이 담겨져 있다.


  “혼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말을 주고받는 행위 역시 대화에 속한다. 모국어로 말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나는 내 속에 수많은 타인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시는 완벽한 모놀로그를 다이알로그로 만들 때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이 없다면 내가 쓸 수 있는 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p.58~59)


  아래의 문장을 보면 시가 움트는 과정을 좀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시인은 문장 하나를 치고 그 뒤를 이어 또다른 문장을 이어간다. 여기서 빛을 시인이 받아 안은 시로 해석하며 읽어 본다. 시를 위한 하나의 문장이 빛처럼 시인에게 다가가고, 그것을 잡았다가 놓아주고 그것을 바라보기도 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이 충돌하고 소리내고 멀어지는 장면을 멋대로 떠올린다. 


  『저녁에 컴퓨터 앞에 앉아 문장 하나를 친다. 빛을 안아줄 수 있는 손은 없다. 그 뒤를 잇는 문장,


빛을 말아 쥐고 손을 오므리면

금방 내 손안에는 그늘만 남는다.

마당 청소를 하다가 햇살 아래에서

동그마니 손을 오므린다.

빛이 사라진 손 동굴

다시 빛을 놓아주기 위해 손을 벌린다.

손금에도 빛은,

빛은 멀리 있는 빛을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도


새가 날카롭게 칼을 떨어뜨리듯

소리 낸다.』 (pp.232~233)


  ’시작 메모‘는 시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시작 메모‘이면서 일종의 일기글이다. ’글들‘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작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남은 우리는 ’글들‘을 통해 그런 작가의 모습과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작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산문의 가장 강력한 힘은 아마도 담담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 흥분하지 않고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 능력이라기보다는 단련을 통해서 나온 인내. 사물과 풍경 앞에서 흥분하지 않기.” (p.209)


  안과 밖이, 속과 겉이 뒤섞이고 뒤바뀌며 뒤엉키는 것이야말로 삶이라고 생각한다. 온화한 격랑과 난폭한 정적은 시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특권을 질시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시인은 떠나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젊어 시인을 알았지만 건성으로 시를 읽었고 나이들어 시인의 시에 재미를 붙이고 나서 시인이 떠났다. 책에 실린 시인의 시를 시리게 읽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읽었다.


  봄꿈


  꽃무늬 바지를 입고 노인은 절집으로 향하는 수유꽃 노란 길을 걸으신다 뼈가 가벼운 새들이 나무 위에서 잠에 겨운 꽃잎을 한 장씩 개키고 있다 절집에는 소풍을 가지 못한 얼굴들이 고기반찬 없는 상을 차리다가 병든 자목련을 바라본다 극락까지 가서 밥을 먹고 지옥으로 돌아오면 마을의 몇 안 되는 염소들은 실개울 곁에 앉아 간첩이 내려왔다는 뉴스가 박힌 신문을 우물거리고 있다 근처 큰 도시에 있는 술집에서 일하던 아가씨 셋이 개여울에서 변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이미 염소의 위장 안에 있다



허수경 / 가기 전에 쓰는 글들 / 난다 / 363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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